궁리칼럼

아무튼, 새에 관한 몇 가지 궁리
등록일:2019-06-20, 조회수:278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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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필리프 뒤부아 지음, 다른)을 읽고


하늘은 땅한테 완벽하게 졌다. 하늘이 할아버지처럼 희고 맑게 늙어가는 데 비해 땅은 새파란 청년처럼 변화무쌍하다. 힘이 불끈불끈 솟아난다. 그 오갈 데 없는 힘을 바탕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건설되었다. 아파트가 올라가고 다리가 건설되고 백화점이 들어선다. 그 사이를 가득 채우는 물건들과 또 그것을 엮어내는 스토리와 광고들은 얼마나 집요한가.

광고도 학문이란다. 그 현란한 세계에 행인들의 시선은 일거에 장악되고 말았다. 최근에는 핸드폰이 또 가관이다. 갤럭시, 삼성, 안드로이드, 아이클라우드, 스카이 등 하늘에서 빌려온 용어를 쓰는 이 가짜 하늘에 코를 박고 사느라 하늘을 볼 겨를이 없다. 

여기까지는 내가 서울에 사는 동안 하늘에 대해 쥐어짜본 생각이다. 일주일을 단위로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생활에서 24절기를 가급적 몸에 밀착시키려 했다. 하지만 서양문명이 워낙 강고해서 그게 잘 안 된다. 벽에 박힌 못처럼 땅에 들러붙어 사는 터라 이왕이면 하늘을 자주 보고 살자 결심했지만 그 또한 잘 안되었다. 나는 하늘이 땅한테 졌노라고 그것을 내탓으로 돌리지 아니했다.

서울에서 파주의 출판도시로 사무실을 옮기고 첫 출근한 날의 일이다. 궁리 사무실은 층층마다 바깥이 있어 외이재(外而齊)로 당호를 정했다. 1층이야 그렇다치고 2층에서 3층, 3층에서 4층으로 다람쥐처럼 옮겨다닐 때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 어떤 바깥을 둘러보는 것 같아 흔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산다는 게 죽음의 그 어떤 아슬아슬한 바깥을 골라 디디며 돌아다닌 것에 불과하다는 궁리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소스라치는 기운이 있었다. 박쥐가 동굴을 푸드덕푸드덕 나는 듯한 소란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발등을 문지르고 지나갔다. 그것은 분명 내것이 아니었다. 

나는 신기한 물건 보듯 모처럼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인왕산 아래의 국악교실에서 나는 틈틈이 퉁소를 배운 바가 있었다. 처음 내기는 힘들지만 몇 번 입술을 간지럽히고 나면 요령이 생겨 그 청아한 소리를 내 주둥이에서도 낼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소리를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소리가 내 뒷덜미를 강타하지 않겠는가. 한강 하구에서 날아와 심학산 자락으로 비켜드는 새떼들의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는 엄청나게 컸다. 새하고 나하고의 거리가 제법 되었는데, 그 소리는 고막을 둥둥 울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몇 번의 관찰 끝에 새가 울 때마다 새의 목울대에 돋아나는 뚜렷한 힘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는 모가지에 퉁소를 장착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날은 나도 후다닥 외이재의 꼭대기로 뛰어올라가 어설픈 퉁소가락을 흉내 내기도 했다.

모두들 어디에서 왔는가. 하늘이 아닌가. 하지만 폐허가 된 배꼽을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그간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鳥, 영어로는 bird를 뜻하는 우리말의 새는 사이의 준말이라고 한다.(새국어어원사전, 서정범 지음, 보고사) 이는 근거를 따지기 이전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어원이라고 생각한다. 새는 그저 아무런 할 일이 없어 하늘과 땅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심심한 존재들이 아닌 셈이다. 하늘과 땅의 사이를 완벽하게 이어주는 것이니, 저 광활한 사이에서 노는 저것을 새라는 말말고 달리 무엇이라고 표현하겠는가. 아무튼, 나는 새소리를 통해 하늘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저들한테 호의적이라는 걸 눈치라도 챘는가. 새들은 유독 궁리 사무실, 그러니까 외이재 지붕을 자주 찾는 것 같았다. 이렇게 써보기는 한다만 이는 나의 아주 터무니없는 주장이고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걸 잘 안다. 그렇다 해도 그건 아마도 내가 저들을 비교적 자주 쳐다보고, 저들이 무심코 그냥 보내지는 않고 희미한 눈빛이라도 던져주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아무튼, 새들은 어느 날부터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나의 신호에 응대하여 주었다. 궁리의 이층 사무실 바닥에는 가장 편한 곳이라 여겼는가. 똥을 후련하게 갈기기 시작했다. 좋다, 새들은 똥도 귀엽고 하얗더라. 

그렇게 조금은 새에 대해 조금은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주말이면 으레 산으로 간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산으로 갈수록 산은 가까워지기는커녕 하늘은 간만큼 멀어지고 새는 또 어디로 숨는다. 그저 소리만 들려줄 뿐이다. 지난주 덕항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조금 비범한 꽃동무가 새를 한 마리 포획했다. 귀한 꽃을 찾느라 바닥을 훑는데 아연, 푸드덕 소리가 나길래 보니 새의 일가족이었다. 아직 날 줄을 모르는 어린 새끼들은 뒤뚱뒤뚱 달아나다가 그만 잡혀버린 것. 그이의 손아귀에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를 보는 나의 눈도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건 날개가 아직 돋지 않아 날지도 못하는 새끼 꿩이었다. 신기한 장면에 사진을 몇 방 찍었다. 몇 번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나의 눈빛도 공포라서 앵돌아진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인간의 뜻밖의 침입으로 풍비박산이 난 둥지 곁에 놓아주었다. 제대로 찾아갈까.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자리를 피하던 어미를 만날 수 있을까. 일단 냄새나는 사람의 손아귀를 피해 낙엽더미로 몸을 숨기는 꿩의 흔적을 좇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물은 등이 뾰쪽해서 누울 수가 없다.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가 앉은자리에서 일어난다. 뒤를 돌아보려면 고개만 돌려서는 아니 되고, 몸 전체를 돌려야 한다. 그러니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늘 산다. 그래서 하늘도 못 본다. 돼지는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궜다가 털을 모조리 벗긴 후, 엉거주춤하게 뒤로 발랑 처음으로 눕는다. 그때 태어나고 처음으로 하늘이 쏟아질 듯 돼지에게 들이닥치지만, 아뿔싸, 늦었다. 이미 눈을 감은 뒤라 저 하늘을 구경 한 번 못하고 고기가 되고 만다. 

새는 날기 위해 공중에 몸을 최적화시켰다. 내장의 길이를 최소화했고, 날개를 최대화했다. 급기야 뼈마다 듬성듬성 구멍을 내었다. 뼈를 깎는다는 말은 예로부터 새를 두고 한 말이었다.허공에 맞추기 위해 몸을 허로 만든 것, 체공시간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아마 한 발로도 걷는 게 가능했다면 새는 지체 없이 한 발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상에서 그건 불가능하다. 마침내 새는 엉덩이를 없애버렸다. 엉덩뼈가 있긴 하지만 그건 내부 뼈의 한 부위일 뿐 길짐승처럼 도톰한 살이 있어 어디에 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무거운 중력을 바깥으로 미룰 수가 없다. 잠시라도 바위나 가지한테 제 무게를 맡길 수 없다. 앉으나서나 제가 부둥켜안고 지낸다. 이렇게 엉덩이를 없애버린 새, 어디로든 쉽게 가고 어디로든 얼른 떠나게 위해 엉덩이를 없앤 건 아니었을까. 

아무튼, 새는 앉는 법이 없다. 새는 서서 앉고 서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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