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일기

책 밖에서 만난 작가┃<번역전쟁>을 펴낸 번역가 이희재 인터뷰
등록일 :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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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번역전쟁』은 2009년 『번역의 탄생』을 출간한 후 두 번째 저작입니다. 그사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A ∥ 글쎄요. 저도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가물가물하네요. 명색이 번역가인데 번역도 많이 안 했고. 많이 읽긴 한 거 같습니다. 진보를 대표하는 미국의 <뉴욕타임스>부터 보수를 대표하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까지 이 세상의 주류 언론이 그려주는 대로만 세상을 보고 살았다는 깨달음이 어느 순간 들면서 그 뒤로는 어떤 사건이든 주류 언론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그 역사적 배경을 캐고 들어가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중남미에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 정작 일은 뒷전으로 밀리고 이것저것 읽으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적어도 국제 문제에서는 정말 믿고 의지할 만한 주류 언론이 없다 보니 속지 않고 살아가려면 제 시간을 투자하는 길밖에 없더라구요. 좀 고달프더군요. ㅎㅎ


Q ∥ 『번역전쟁』 출간소식을 접한 독자들이 『번역의 탄생』 후속작이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전혀 다른 분야의 책입니다. 『번역전쟁』을 어떻게 쓰시게 되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요?

A ∥ 처음부터 책을 쓰려고 마음먹은 건 아닙니다.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이 서양 주류 언론에서 이상하게 그려지는 것이 석연치 않아서 나름대로 책도 읽고 관련 자료도 뒤지면서 <모난돌>이라는 온라인 소식지에 그때그때 연재했지요. 읽는 사람은 백 명도 채 안 되는 미니 월간지였지만 진부하게 쓰기가 싫어서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책으로 낸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고 그저 제가 알고 지내는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쓴 글들이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잘 알고 싶은데 믿을 언론이 없다 보니 제 나름대로 언론인이 된 기분으로 썼다고나 할까요.

번역은 가령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이지요. 말과 말을 잇는 일이지요. 그런데 현실을 영어든 한국어든 말로 담아내는 것 자체가 넓게 보면 또 하나의 번역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들었고 그 현실 번역이 돈을 가진 사람들의 관점으로만 압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언을 하자면 우리가 쓰는 중요한 말, 개념의 대부분이 돈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사람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런 전쟁에서 99퍼센트 다수는 일방적으로 당했구요. 아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요.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치열한 ‘말의 전쟁’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Q ∥ 이 책의 주요 키워드로 ‘다원주의, 포퓰리즘, 극우, 진보, 민영화, 인턴 등’ 우리가 언론매체에서 늘 접하는 35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선택한 기준이 궁금합니다. 평소 번역작업을 하면서 말과 말 사이뿐만 아니라, 말과 앎 사이의 관계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A ∥ 말 자체가 무기로 쓰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다원주의’는 서양식 다당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를 공격할 때 많이 쓰이지요. ‘포퓰리즘’은 다수 서민을 섬기려는 체제를 공격하는 용도로 애용되구요. ‘극우’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타국을 증오하는 사람은 극우라는 말을 들어도 싸지만 자국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싸잡아 극우라고 부르는 것은 극우라는 말의 남용이고 오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들이 오용되고 남용되면 우리는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흐트러놓는 세력을 정조준하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가령 ‘서민주의자’를 ‘포퓰리스트’라고 부르면 우리는 현실을 잘못 읽게 됩니다. 저도 한때 그랬지만 사정도 잘 모르면서,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을 비웃게 됩니다. 잘못된 말이 온전한 앎을 가로막는 거지요. 그걸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아옌데의 집권보다 키신저가 더 두려워한 것은 아옌데가 재임에 성공하든 않든 무사히 임기를 마침으로써 칠레에 민주적 헌정 질서가 자리잡는 것이었습니다. 아옌데 모델이 성공할 경우 미국은 중남미를 모두 잃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Q  ‘서민주의’를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사유화’를 ‘민영화’로 미화하는 세력을 ‘금벌(oligarch)’이라 정의하며,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금벌’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주십시오.

A ∥ 다수 서민을 진심으로 섬기려던 서민주의자 차베스를 무책임한 포퓰리스트로 왜곡한 서방 정치 집단과 서방 언론의 배후에 있는 물주라고나 할까요. <뉴욕타임스>, <가디언> 같은 진보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금벌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돈벌이고 그 돈벌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을 없애는 겁니다. 그런 걸림돌을 없애는 가장 요긴한 수단이 전쟁이구요. 그래서 이런 진보지들은 문화적으로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다가도 중요한 대목에서는 금벌의 전쟁을 돕습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반성하는 척했지만 리비아에서, 시리아에서 다시 본색을 드러냈지요.

냉전 이후 멀리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 공격 때도 비슷했습니다. 더 멀리는 1차대전, 2차대전도 비슷합니다. 전쟁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1차대전, 2차대전 모두 독일이 전범국으로 낙인 찍혔지만 독일은 전쟁에 끌려들었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전쟁을 갈구했던 건 영국과 미국이었지 독일이 아닙니다. 물론 독일이 정의로운 나라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모두 정의로운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거지요. 그 이후의 전쟁도 마찬가지구요.

절대 다수의 국민은 전쟁으로 말못할 고통을 겪지만 금벌은 전쟁으로 돈을 법니다. 전쟁으로 나라빚이 늘어나면 나라 재산을 사유화할 수 있는 길도 열리구요. 금벌은 언제라도 전쟁 꼬투리를 만들어내려고 평소에 마음에 안 드는 몇 나라를 집요하게 악마로 그립니다. 가령 지금은 러시아가 그렇지요. 그런데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증오한다고 해서 한국까지 러시아를 혐오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러시아는 천사 나라도 아니지만 악마 나라도 아닙니다. 한반도와도 붙어 있는 나라입니다. 땅도 넓고 자원도 넓고 한국이 잘 지내야 할 이웃입니다. 러시아는 중국하고는 국경 분쟁으로 전쟁도 했고 일본하고는 러일전쟁에서 패한 악몽이 있어서 두 나라를 경계하지만 한국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러시아 때리기에 동참하면서, 한국에 호의를 가질 가능성이 많은 러시아를 등지게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돈벌이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전쟁으로 제거하면서 돈벌이를 하는 집단이 금벌입니다. 금벌은 어떻게 하면 전쟁을 벌일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음모론이 아니라 음모입니다. ‘음모’를 ‘음모론’으로 바꿔치기하는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도 음모입니다.


Q ∥ 언론매체에 비쳐지는 카다피, 만델라, 하토야마, 무가베, 아사드 등의 정치인들에 대해 이 책에서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론매체가 대중에게 전하는 프레임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면 좋을까요?

A ∥ 서방 주류 언론은 금벌에게 복무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습니다. 진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이 서방 주류 언론 특히 진보 언론을 너무 잘 믿지요. 짐바브웨의 무가베는 1980년 무장항쟁으로 이겨서 독립을 쟁취했는데 당시 남아공 만델라 등은 감옥에 갇혔던 처지라 짐바브웨가 너무 강하게 나가면 남아공 백인이 양보하지 않을 테니 제발 온건하게 나가달라는 만델라 측의 읍소에 백인의 토지 보유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한 15년 동안 서방 언론에서 무가베는 명예박사 학위를 여러 개 받았고 훗날의 만델라에 버금가는 성자 반열에 올랐지요.

그러다가 옥토의 절대 다수를 백인이 차지한 상태에서 짐바브웨 다수 국민의 여건이 나아지지 않아 토지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무가베는 악마가 되었지요. 그랬던 무가베는 지금 자기 당 안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는데요. 그 근본 배경에는 영국의 금융 공격이 있습니다. 무가베가 백인 토지 수용 정책으로 돌아선 뒤 짐바브웨 통화는 곤두박질쳤습니다. 제조업 기반이 약해서 공산품 수입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통화가 흔들리면 경제가 자리를 잡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서방 언론에서는 이런 배경은 짚지 않고 무능한 무가베가 짐바브웨 경제를 말아먹었다고 떠들었지요. 농촌은 토지를 보유한 흑인이 늘어나 그런 대로 굴러가도 도시는 제조업 기반이 없어 실업자가 많으니 짐바브웨 국민도 불만이 커졌겠지요.

한 나라의 통화를 공격하는 것은 침략과 다를 바 없습니다. 흔히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1차대전 이후 독일의 초인플레를 들지요. 무능한 독일 정부가 무분별하게 마르크를 찍는 바람에 1달러에 2조 5천억 마르크까지 치솟았다면서요. 그런데 여기에도 배경이 있습니다. 독일 초인플레는 1922년 중반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1922년 4월 중순 독일과 소련이 관계정상화를 합니다. 독일은 패전국으로, 소련은 공산주의국가로 유럽에서 모두 왕따 신세였거든요. 독일은 소련의 자원이, 소련은 독일의 기술이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발끈했지요. 패전국 주제에 무엄하게도 소련과 관계정상화를 시도한 독일의 발터 라테나우 외무장관은 두 달 뒤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마르크화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은 중앙은행에 대한 독일 정부의 감독권을 없앴습니다. 외국 투기꾼들은 독일 은행에서 마르크를 빌린 다음 바로 팔아서 마르크 가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럼 독일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의 가치는 줄어들고 투기꾼은 그만큼 돈을 벌지요.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마르크는 폭락했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은 영국을 등에 업은 투기꾼들이 아니라 독일 정부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서방 언론의 특징은 이런 역사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현실 자체도 틀리게 보도할 때가 많지만 설사 현실을 보도하더라도 눈앞의 현실만을 보도하는 게 다가 아닙니다. 짐바브웨 경제를 처음부터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 어떤 정책이 그렇게 만들었는지까지 짚어주어야 합니다. 하나의 ‘사실’은 시공간이라는 맥락 안에 놓였을 때만 ‘진실’로 승격될 가격을 갖습니다. 역사와 절연된 ‘사실’은 절대로 ‘진실’이 못 됩니다. 찰나의 순간만을 그리는 사진이 가장 현실을 왜곡하기 쉬운 매체가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죠.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서방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양심적이라는 주류 매체도 역사를 거두절미한다는 것,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업보인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무가베가 짐바브웨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다수 아프리카 주권자가 뽑은 지도자를 자원 수탈을 노리고 번번이 몰아낸 ‘국제사회’가 아니라 짐바브웨 국민에게만 있습니다.ⓒ Reuters/Philimon Bulawayo

Q ∥ 지금 집필중이거나 앞으로 더 쓰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살짝 들려주세요.

A ∥ <점과 선: 영한사전의 기원>이라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만든 영일사전을 사연도 맥락도 모르고 그때그때 베끼면서 ‘점’처럼 살아온 것이 한국 영한사전의 역사라는 내용입니다. <번역의 탄생> 속편도 내고 <번역자의 영한사전>도 준비 중입니다. 번역도 물론 해야지요. 이 세상을 정확히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쓰고 싶고 또 그런 책을 번역하고 싶습니다.


Q ∥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이야기해주세요.

A ∥ 불법과 반칙이 횡행하던 한국 사회를 바로잡으면 한국도 상식과 원칙이 지배하는 선진 국제사회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많은 한국인이 믿겠지만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세력이 중심을 꿰찬 썩은 국제사회에 선진국은 없습니다. 있다면 선진 시민이 있지요. 이른바 선진국에 사는 시민은 선한 일을 하는 데에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습니다. 이른바 후진국에 사는 시민은 선한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듭니다. 때로는 목숨도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값집니다. 선진 시민은 이른바 선진국에 살면서 자기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믿는 교양 있는 백인이 아니라 이른바 후진국에 살면서 자기 하나라도 이 세상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며 절망과 싸우는 아프리카 빈국의 시민입니다.

한국은 문치의 역사가 강한 나라입니다. 민주주의는 자기에게 불리한 결과도 수용할 줄 아는 자세, 주먹이 아니라 말을 따르는 제도입니다. 일본도 그렇지만 서양도 기본적으로는 말이 아니라 주먹으로 세상을 움직여온 체제입니다. 앞으로 민주주의를 한국 밖에서도 주도할 수 있는 잠재력은 한국에 있다는 책임감과 절박감을 좀더 많은 한국인이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잘 알아야겠지요. 이 세상에서 원칙과 상식을 무너뜨리는 세력을 정조준할 수 있어야겠지요. 제가 쓴 책이 그런 정조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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