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일기

미리 읽는 책 한쪽┃<민변 30년-인권과 민주주의의 한길로> 민변 3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등록일 : 20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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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출발



‘민주변호사 협의회!’
‘민주화보다 민주사회가 낫지 않을까?’

1988년 5월29일 아침 경기도 포천에 있는 베어스타운 회의실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인권변호사’ 또는 ‘민권변호사’라고 불려오던 일군의 사람들이 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이 어 받아 새로이 단체를 창립하는 모임을 가진 둘째날이었다. 그 전날 정관과 사업계획을 정하고 밤새 결의를 다진 변호사들은 이른 아침부터 이제 막 태어난 조직의 이름을 짓느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변호사의 기본윤리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옹호이건만 우리 사회에는 어느새부터인가 일반변호사와는 다른, 인권변호사라는 이름을 단 변호사가 하나 둘 생겨났다. 누가 누구를, 어느 시점부터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군사독재의 탄압에 저항하는 양심수를 변론하는 변호사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양심수를 위해 변론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던 시기에 그 변호를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재판 전후로 종종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사찰을 당하기도 함은 물론 심지어 자신들이 변호하던 피고인의 자리에 서서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한승헌 변호사는 간첩죄로 사형 당한 김규남 씨의 억울함을 애도하는 수필을 썼다는 이유로 구속되었고, 이후 독재정권에 의해 8년간 변호사 업무를 정지당했으며 강신옥 변호사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변론하며 긴급조치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양심수 변론을 도맡아 하여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와 함께 인권변호사 4인방으로 불리던 이돈명 변호사 역시 전두환 정권에 체포되기도 하였고, 1986년에는 수배중인 이부영 선생을 숨겨줬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두려움에 변론을 포기, 또는 중단하였는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독재의 서슬 퍼런 법정에서 그들은 법리와 논리를 무기로 의연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리하여 가족이나 친구 중 누군가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소리도 없이 끌려가면 사람들은 그런 변호사들을 찾아 왔다. 검찰과 법원이 숨죽이며 정권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을 때 저항자들에게는 유일한 방패막이였던 변호사들을, 사람들은 인권변호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70, 80년대를 가로지르는 동안 이병린, 홍성우, 강신옥, 조준희, 이돈명, 유현석, 황인철, 조영래 변호사를 이어 나무가 하나 둘 자라 숲이 생겨나듯 인권변호사들도 그들만의 작은 숲을 이뤄가고 있었다. 독재의 탄압에도 저항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1985년 2월 구로지역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에 대한 정부의 구속조치에 항의하며 일어난 동맹파업과 여기에 참여한 학생, 지식인들에 대한 공동변론을 거치며 호흡을 맞추고 자신감을 나눈 변호사들은 조심스럽게 조직결성의 뜻을 모아나갔다.

그 모임의 이름이 정의실천법조인회, 약칭 ‘정법회’였다. 그 수는 비록 30명 남짓이었지만,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를 염원하는 지식인, 노동자, 문인, 언론인, 대학생 등으로부터 가장 신망 받는 변호사들의 모임이었다. 1986년 5월 19일 서울 영동의 반도유스호스텔에서 창립총회를 가진 정법회는 훗날의 민변에 비해서는 비록 낮은 차원의 느슨한 결합이긴 했으나, 개별적・분산적인 인권변론의 차원을 한 계단 높여 연대와 조직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틀이었다. 정법회는 인권변호 활동이 ‘지사적’ 결단에서 조직화된 사회운동으로 넘어가는 첫걸음이었다.

한편 정법회와 별도로 80년대의 사상 세례를 받으며 법조운동을 체계적으로 고민하는 일군의 젊은 변호사 그룹도 6월 항쟁이 벌어진 1987년 말부터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석태, 김형태, 유남영, 조용환을 포함한 청년변호사 모임을 준비하는 그룹이었다. 조직이 공식적으로 발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청년변호사회(약칭 ‘청변’)이라 칭하고 새로운 변호사운동을 위한 조직을 고민하였다. 청변의 회원들은 70년대 중・후반 긴급조치의 최루탄 세례 속에서 대학을 다니고, 80년대 ‘서울의 봄’과 광주 학살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 세대였다. 이들은 사회변혁운동의 한 부문으로 변호사운동을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 변호사들에게도 사회과학 공부는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변호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의 장은 법정이요, 법을 통해서였다. 노동현장에서 구속되고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변호사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과 같이 어깨동무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변론과 적절한 법적 대응이었다.

청변의 변호사들은 노동자들에게 헌법의 노동 3권과 노동조합법의 내용을 제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했다. 혼자나 얼마 안 되는 소규모의 변호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축적된 노하우와 연대가 필요했고 선배들의 이끎과 조언이 긴요했다. 이런 자각이 청변의 변호사들에게 시간이 지나면서 공유되었다. 양쪽의 모임에 모두 참여하고 있던 박원순, 백승헌 변호사가 다리를 놓았다. 그렇게 해서 청변의 후배들은 기꺼이 정법회 선배들이 이끄는 흐름에 합류하였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역동적인 결합체 민변이 탄생하였다.

다시 30년 전의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본다. 기대와 열의가 유달리 컸던 탓인지, 새로운 단체의 이름을 짓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칠판에 하나 둘씩 후보가 될 만한 이름이 올랐다. ‘민주변호사회’, ‘민주변호사협의회’에서 시작된 논의는, 이름의 들머리를 ‘민주’로 할 것인지, ‘민주화’로 할 것인지로 옮겨갔다. ‘민주’까지는 서로 같지만, ‘민주’와 ‘민주화’는 의미가 영 다르다는 의견이 이어졌다. 누군가로부터 ‘민주사회’라는 단어도 나왔다. 단체 이름을 이룰 단어들은 다 나왔지만 이 단어들을 어떻게 이어 붙일까 참석자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조용히 일어나 새로운 이름 하나를 칠판 위에 써내려갔다. 다소 낯선 조합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그 사람은 조영래 변호사였다. “지금은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말로 된 이런 이름을 자연스럽게 많이들 쓰게 될 것”이라면서 그는 ‘협회’나 ‘회가’ 아닌 ‘모임’으로 뜻을 엮을 것을 제안했다.

조영래 변호사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진보개혁적 법률운동과 인권증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조직적 운동을 결의한 조직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민변의 창립회원은 51명이었으며 새로운 모임의 대표자로 집단지도체제에 가까운 대표간사제를 채택했다. 대표간사제를 도입한 것은 변협이나 지방변호사회 등의 제도권 변호사 단체와 같은 형식을 지양하고 회원 모두가 동등한 권한과 책임을 갖고 참여한다는 취지였다. 선배그룹에 덕망과 겸손함으로 두루 신망이 높은 조준희 변호사가 선후배들의 강권에 못 이겨 첫 대표간사직을 맡게 되었다. 조직은 총회 아래 운영위원회와 홍보위원회, 특별위원회 등 3개 위원회를 두는 형태로 꾸려졌다. 운영위원회 안에는 총무・변론・학술기획 분과를, 홍보위원회 안에는 홍보와 편집출판 분과를, 특별위원회 안에는 사법제도・양심수・언론방송・산업노동・농민빈민・환경도시・여성・통일평화・지방자치 분과를 각각 두었다. 각 위원회의 간사는, 두 단체의 통합 취지를 살려, 정법회와 청변 출신이 1명씩 나란히 맡았다. 운영위원회는 홍성우・박인제가, 홍보위원회는 조영래・이양원, 특별위원회는 황인철・이석태가 각각 간사를 맡아 수고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인권변호사들의 총본산’이라 할 민변의 깃발이 한국사회에 높이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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