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2012년 공동선 총서 첫 번째 책인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집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2014년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집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에 이어 세 번째 책으로 일본의 저명한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을 인터뷰한 『가능성의 중심』을 출간했습니다. 만나고픈 학자들의 책을 읽고 공부하며, 그들을 만나 육성을 기록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공동선 총서 시리즈 세 권을 펴낸 소감이 어떠신지요? A ∥ 무엇보다 이 지난한 여정에 함께 해주신 분들이 생각납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지젝, 바우만, 가라타니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함께 고생해준 궁리 식구들과 인디고 연구소 팀원들에게도요. 세 번째 인터뷰를 끝낸 지금,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느낌입니다. 몇 개의 언덕을 넘었을 뿐, 여전히 고지는 멀리 있습니다. 한숨 돌리고 다시 출발해야죠! Q ∥ 특히 가라타니 고진과의 인터뷰 프로젝트는 꽤 오랜 시간(4년)이 걸렸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직 가라타니 고진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어떤 연구와 활동을 하는 학자인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분을 인터뷰하게 된 계기 또한 궁금합니다.
A ∥ 슬라보예 지젝은 저서 『시차적 관점』을 출간할 당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를 꼽았습니다. 가라타니는 문학, 역사, 철학,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을 재해석한 독특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가라타니 만큼 예리한 눈과 거시적 비전으로 읽어낸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가라타니에게 ‘사유 기계’라는 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가 자본주의 이외의 삶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지역적인 소규모 대안 운동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체제에 대한 비전은 여전히 제시되지 않았다고도 했고요. 가라타니 고진은 그동안 ‘세계공화국’이라는 실행 (불)가능한 비전을 제시해왔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려내기 힘든 개념인데, 이에 대해 더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 세계공화국은 가라타니 사유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가라타니의 사유가 늘 그렇듯이, 이 또한 우리의 통념과는 분명 다른 개념인데요. 아마 이 개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통합된 하나의 공화국이 그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라타니가 말하는 세계공화국은 하나의 이념이자 형식입니다. 즉 국가들 사이의 관계 자체가 기존의 약탈과 전쟁을 일삼는 제국주의적 권력이 아닌, 증여와 윤리를 토대로한 평화에 기반하여 재편되는 것을 뜻합니다.
Q ∥ ‘세계공화국’이 초국가적 차원의 대안이라면, 한 국가 내의 사회경제적 대안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소비주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 대안으로 어떤 걸 제시했는지 궁금합니다.
A ∥ 실제로 가라타니는 2000년대에 신어소시에이션운동NAM을 창립하기도 했지요. 새로운 형태의 협동조합운동으로서, 소비자=노동자 운동의 한 형태였습니다. 소비주의 사회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바로 노동자가 곧 소비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생산한 물건을 다시 소비하는 행위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굴레 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이고 강력한 형태의 사회경제적 실천이 바로 소비자=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동인 것이지요. 보이콧, 불매운동, 협동조합 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Q ∥ 가라타니 고진은 도쿄대학교 경제학부 출신이지만 문학비평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마르크스, 칸트,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스피노자 등의 텍스트를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들 중 특히 칸트와 마르스크의 텍스트를 어느 정도 읽어내야 그의 저작들을 소화할 수 있다는 부담감이 있기는 합니다. 고진은 왜 이 두 인물의 저작들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요?
A ∥ 우선 가라타니가 칸트나 마르크스 등의 어렵고 두꺼운 저작들을 상대적으로 쉽고 간단하게 요약해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할 듯합니다. 이들을 직접 읽고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가라타니의 설명을 통해 읽는 칸트나 마르크스는 훨씬 명료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가라타니에게 칸트는 새로운 윤리적 가능성을 위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그에 대한 사회경제적 분석틀이 되어주지요. 이에 덧붙여 헤겔은 정치적 비전을 제공한다고 보여집니다. 이들을 모두 접목하여 자신만의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바로 가라타니 사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 “저는 이론적인 것에 대해 늘 고민하고 사유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 저는 그들을 따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높은 이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기에 때론 타협해도 좋습니다만, 이념만큼은 제대로 가져야 합니다. 최근에는 이념을 냉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이념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는 고진의 말이 어떻게 보면 시대 역행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는 왜 ‘이념’을 강조하는지 궁금합니다.
A ∥ 네 맞습니다. 1990년대 이후 이데올로기는 이미 많은 이들로부터 한물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빛바랜 이념을 다시금 강조하는 가라타니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원대하고 거시적인 비전의 필요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은 이념 없이도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념 없이는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고, 변화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도 사라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념은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더욱 긴요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Q ∥ 두 번의 인터뷰를, 한번은 일본 도쿄 외곽의 고진 자택에서 또 한번은 부산 인디고 서원에서 했습니다.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떠했나요?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A ∥ 가라타니 선생님은 진중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무심한 듯 던지시는 유머 감각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할까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진지한 답변 속에서 드문드문 등장하는 유머에 모두가 웃음을 지었습니다. 자택에서 인터뷰가 끝난 후 식사를 하며 술도 한잔씩 함께 마셨는데요. 유머가 한층 더 강렬해지셨던 기억이 납니다. 또 적재적소에 던지시는 한국어 문장도 생각이 나네요.
Q ∥ ‘공동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앞으로도 계속 연구해나갈 계획일텐데, 인디고 연구소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신다면요?
A ∥ 공동선 총서의 기획은 우리가 공동으로 직면한 문제들에 함께 대응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공동으로 처한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하는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통의 문제는 다양합니다. 분야도 여럿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야와 대상을 계속해서 넓혀나가고자 합니다. 철학, 사회학, 사학 뿐만 아니라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의학 등 이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고 또 창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분들을 만나서 그 분들의 말씀을 소통가능한 언어로 많은 분들게 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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