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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현장의 나무 두 종류 - 건축 일기 35

1. 상수리나무 앞으로 차근차근 기록하겠지만, 궁리의 형편이 빠듯했지만 건물을 짓기로 마음을 먹게 된 건 2011년 추석 지나고 참가한 삿포로 건축기행에서였다. 그곳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독안의 든 쥐와 비슷한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태 파악을 재빨리 하고 나자 마음이 외려 홀가분해졌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좋다, 쥐라고 치자. 그렇다고 독 밑바닥을 뱅뱅 돌다가 지쳐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차라리 독 안에서 독을 깨부수자! 일생의 회심(回心)을 결행하였던 것이다. 우울과 희망이 교대로 찾아왔던 삿포로 기행. 궁리 건물의 설계자인 조성룡 선생님과의 첫 만남,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인 후미히코 마키 선생님의 강연, 실낙원의 작가인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안도 다다오의 작품) 방문 등 많은 일정을 소화했지만 지금도 기억에 가장 뚜렷하게 남은 삿포로 시내의 가로수이다. 새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낯선 이국의 가로수는 마가목이었다. 여행 떠나기 전, 설악산 대청봉 부근에서도 실컷 본 마가목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높은 산의 정상에 많이 분포하는데, 이곳은 가로수 심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울릉도에도 마가목이 가로수로 조성되어 있다. 어느 해 울릉도 늦봄에 탐사 갔을 때,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가을에 마가목 열매 익을 때 와! 라고 유혹하셨더랬다. 마가목 열매가 관절염에 특효약이라고 하시면서. 나무에 연원을 둔 그런 기억과 함께 파주에서 공사를 시작했을 때, 황량한 부지에서 눈에 띄는 건 출판도시에서 조성한 가로수인 상수리나무였다. 그때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인 지라,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온 나무는 얼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래도 신기한 건 바짝 마른 낙엽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조량이 극히 부족한 날씨에서 그나마 희미한 온기라도 공중에서 퍼 담기 위해서 잎을 포클레인처럼 꼬부리고 있는 것일까?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듯, 줄기도 그리 굵지가 않기에 사람으로 치면 그저 중학생이나 될 듯싶은 나무를 보면서, 나는 이 나무가 올해에 제대로 자라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우리 건물이 콘크리트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헤르만하우스 옆 높이 자란 나무의 까치둥지나 보면서 주위에 대한 관심을 잠시 꺼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겠다고 컨테이너 사무실을 나서 건물을 일별한 뒤 모처럼 펜스 바깥으로 한 바퀴 돌 때였다. 이제껏 건성으로 지나쳤던 가로수, 비실비실 제대로 자라나지 못할 줄로 알았던 상수리나무가 녹색의 옷을 입고 의젓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나의 나머지 생의 대부분을 야생화와 나무에 바치기로 작정한 마당에 정작 주위의 생태계에 너무 소홀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추위를 이겨낸 대견한 나무를 향한 고마움이 동시에 일어났다. 괜히 머물면서 귀찮을 정도로 오래 나무를 쓰다듬어 주었다. 공사장 곁의 상수리나무가 이렇게 성성하게 자라나듯 우리 공사도 무탈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2. 계수나무 낮이 밤으로 교체되는 오묘한 저녁의 시간. 노을이 지고, 이웃한 헤르만 하우스에서도 방마다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뜨겁던 해도 서쪽 하늘에서 작은 등불이 되어 달려 있었다. 2층이라지만 아직 벽이 없고 더구나 지붕이 없어 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곳은 나에겐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하기 이를 데 없는 방이었다. 도면으로 볼 때는 실감이 오지 않았는데 실제로 바닥을 거닐어 보니 예상보다 넓은 면적이었다. 몇 바퀴 거닐다가 서슴없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삐끄덕거리는 계단을 올라, 삐쭉한 철근 사이로 발을 내밀어 2층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리는 순간,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생각이 찾아왔던 것이다. 하얗게 빻은 밀가루가 찬찬히 쌓인 곳, 곱고 고운 모래가 퇴적되어 쌓인 곳 같은 2층의 콘크리트 바닥에 발을 놓을 때, 혹 나는 지금 달 표면에라도 착륙한 것이 아닐까! 벌렁 드러누운 채 하늘의 등불이 지는 것도 보면서, 인간의 마을에서 전깃불이 켜지는 것도 보면서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터무니가 없어도 좋다. 하늘에 달이 뜨기 전까지 여기는 분명 나에겐 달의 표면이야! --- 건축 일기 22, 〈2층 바닥에 벌렁 드러눕다〉 중에서 위에 적은 바처럼 나는 2층 공구리가 굳고 난 뒤에 그곳에 오르는 기분을 달의 표면에라도 오르는 듯 표현한 바가 있었다. 그렇게 하고 며칠이 지난 뒤, 공사현장이 아니라 공사장 주위의 생태계를 둘러보자는 생각이 일어났다. 우리 바로 앞은 습지이고, 바로 그 건너편은 전원형 아파트인 헤르만 하우스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녹색의 띠가 있어 전망이 참 좋다. 2차선을 넘어 습지를 보니 수양버들과 느티나무, 갈대, 수크령 등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나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계수나무! 아, 이곳이 달의 표면이라고 한 것이 전혀 터무니없다는 말은 아니었구나!

잎이 유난히 귀엽고, 가장자리마다 붉은 기가 감도는 계수나무. 이름이 계수나무이지만 달나라에 산다는 계수나무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식물학적인 이야기이고 그 이름만으로 이미 나는 계수나무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4-5월경에 꽃이 피는데 올해는 상수리나무를 소홀히 하였듯 계수나무의 꽃이 다녀가는 줄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궁리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각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각자의 소임을 마치고 임무교대를 한다. 2-3일 주기로 교체하는 현장에서 점심시간 풍경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12시가 되면 함바집에서 배달해온 식사를 하고 모두들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오후 작업을 위해서 잠깐 숙면을 취하는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서는 공사장 안의 구석으로 스티로폼 한 장을 깔고 눕는다. 이제 날씨가 따뜻하다 못해 푹푹 찐다. 궁리 건물은 다행히 중정이 있고 통풍이 아주 잘된다. 대부분 중정과 1층의 복도 사이에 고단한 몸을 누인다. 그리고 아주아주 달콤한 낮잠. 언제부턴가 궁리와 헤르만하우스 사이 습지의 둔덕을 찾는 분들도 있다. 그곳에 얇은 송판을 깔고 주무시는 것이다. 그곳은 느티나무, 버드나무와 함께 계수나무가 달콤한 그늘을 제공하는 곳이다. 오늘도 몇 분이 나무 아래에서 그늘을 깔고, 녹음을 덮고 있다. 계수나무 아래에서 홀린 듯 주무시는 분들은 지금 꿈속에서 달나라를 거닐고 계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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