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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현장 풍경, 두 번째 - 건축 일기 27


1. 시멘트 위의 먹물통


건축은 한 층을 올릴 때마다 전혀 다른 국면이 전개된다. 매듭을 정확하게 지으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셈이다. 이른바 공구리를 치고 하루가 지나 임시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깨끗한 콘크리트의 세계! 시멘트에는 직립하는 인간을 쓰러뜨리고자 하는 무슨 성분이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 그 앞에 서면 저절로 한번 벌러덩 눕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 도화지처럼 하얀 곳에 먹줄을 놓고, 표시된 대로 철근배근 공사를 진행한다.


1층 공사 끝나고 2층 바닥에 올라가 보니 공사장 한켠에 눈에 익은 기물이 있었다. 시골에서 집 지을 때 목수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던 먹물통이었다. 땅콩과 비슷한 구조의 먹물통에는 먹물이 촉촉해서 먹줄을 적시고 있었다. 일일이 선을 그을 필요 없이 한 번 들었다 탁 튀기면 콘크리트 바닥에 검은 금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볼펜이나 연필로는 저 우둘두툴한 콘크리트의 거친 표면에 아무리 용을 써도 흔적을 남기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나 많이 공사장을 돌아다녔는지 먹물통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가방은 맨진맨질했다. 이 방면에 관한한 고수의 아우라가 확 풍기는 가방이었다. 열린 가방을 슬쩍 보았더니 물통과 자, 그리고 먹물통이 있었다. 먹물통에는 “書道用高級墨液 松竹”이란 상표가 뚜렷하였다.


정식으로 배운 바는 없지만 나도 가끔 붓을 잡을 때가 있다. 필기구를 가지고 한 인간의 일생을 정리할 수도 있겠다. 이제 인생의 절반을 소화한 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연필-볼펜-만년필-붓. 요즘이야 육필은 드물고 컴퓨터나 핸드폰의 자판을 두들기는데 익숙하다. 그러니 글을 쓴다기보다는 글을 때린다는 말이 더 적확한 표현이겠다. 어떻든 나는 뒤늦게 먹의 세계에 빠졌고 틈만 나면 붓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려 하는 편이다.


철근과 못, 스티로폼, 핀 등의 날카롭기 그지없는 것들로 뒤덮인 콘크리트 바닥에서 저 고급 먹물을 보자니 여러 생각이 일어났다. 부드러운 것이 딱딱한 것을 이긴다는 말까지 여기에서 한다면 너무 거창한 말이겠다. 서도용고급묵액 송죽! 어느 상투적인 서예학원의 식은 벼루 곁이 아니라 이 거친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대기하는 먹물 한 방울이야말로 살아있는 예술의 한 포즈가 아니랴. 그래서 떠오른 예전에 쓴 글 한편을 여기에 적는다.


1996년 2월 어느 날. 동소문동에 있는 김구용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선생이 번역한 <동주 열국지> 전 10권이 민음사에서 완간된 터라 이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편집부에서 근무하던 여류시인과 함께 갔더니 한복 차림의 선생은 작은 마당이 있는 한옥에서 웃으며 맞아주셨다.


2001년 12월 28일. 김구용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는 선생의 부음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시인이자 번역가로,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독보적으로 해석한 한학자이자 서예가로 살아온 김구용(金丘庸.본명 金永卓)선생. 그는 4~5년 전 병을 앓게 된 뒤 곡기를 끊고, 아무에게나 귀와 입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듯 막걸리로만 살아가다 지난 28일 79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로부터 1년 후. 김구용 선생의 1주기를 맞아 학고재에서 추모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선생이 주변에 건네준 친필 글씨·엽서·그림 등이 주로 전시되었다. 나는 이 전시회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소개된 엽서를 보고 한 마디로 뻑, 가고 말았다. 그것은 선생이 소설가 이문구에게 보낸 우편엽서였다. 엽서에는 우편번호를 쓰는 작은 네모 칸과 주소와 수신인을 적는 세 줄이 있다. 그 인쇄사항을 모두 무시하고 그냥 횡으로 써내려간 이문구 댁의 주소와 <李文求 座下>란 붓글씨는 거침이 없었다. 예술인척 하면서 액자에 들어있는 모모한 글씨들보다도 우편엽서에 적힌 그 글씨에서 나는 마지막 선비 김구용 선생의 기품 서린 획을 발견했다. 생활에서 우러나온 그 글씨야말로 살아있는 글씨가 아닐 수 없었다.


2010년 10월의 어느 날. 평창동의 김종영 미술관에서 <김종영을 말하다>라는 작은 책자를 구했다. 조각, 드로잉, 회화, 서예에 두루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 미술관의 실질적 주인인 김종영(1915-1982) 화백의 예술과 인생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책자였다. 이 책자 8쪽에 김종영 화백이 동경 유학시절 부친이 보낸 편지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편지속의 일필휘지 또한 글씨의 손맛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사진 속 봉투에 붓글씨로 적은 주소를 보는 순간 김구용 선생의 엽서도 생각났다.


이날 나는 새삼 깨달았다. 작품으로는 대접받지 못하지만 일상에서 밀착된 것에서 얼마든지 예술의 참맛을 건져 올릴 수 있다는 것을!


---- 궁리닷컴, <포토에세이>에서 인용함.




2. 자동차라고 하는 장난감


장난감의 묘미는 만지작거리는 데 있다. 장난감은 손바닥 안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하는 뜻을 충분히 받아준다. 이렇게 마구 함부로 내키는 대로 다루어도 대꾸 하나 없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주는 건 장난감밖에 없다. 아이나 어른들이나 장난감에 빠져드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말하는 장난감이 나온다면 아무도 거덜떠도 안 볼 공산이 크다. 그러지 않아도 잔소리에 지쳤는데 장난감한테까지 그런 지청구를 들을 필요는 절대 없는 것이다. 반려견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들이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이 장난감에 빠지는 데에는 순서가 있다. 사내아이라면 대개 공룡, 자동차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레고이다. 여자아이라면 인형이거나 레고로 비교적 오래 간다. 드물게 광학기기로 옮아가는 경우도 있기는 있다. 그러다가 대부분 컴퓨터 게임에 빠진다. 아이들만 어디 그럴까. 어른이 되어서 마지막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있다. 그것은 엔진이 달린 자동차이다. 자동차는 어른이 가지고 노는 최후의 스릴 넘치는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축현장에는 다양한 차들이 차례로 동원되었다. 항타기, 굴삭기(포클레인), 지게차, 기중기, 등등 이었다. 모두들 기가 엄청 센 것들이라서 가까이 가면 위압감을 엄청 주는 것이었다. 토목공사가 끝나고 골조공사가 시작되면서 층이 오를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건 레미콘과 콘크리트 펌프였다.


콘크리트 펌프는 코끼리보다 더 긴 코를 장착하고 있었다. 레미콘이 즉석에서 공급해주는 콘크리트가 긴 코를 타고 작업 현장에 콸,콸,콸 쏟아졌다. 기사는 아코디언 혹은 노래방의 예약기기 같은 것을 허리에 차고 작업을 지휘하였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갛게 쭉 뻗은 그 코는 장관이었다.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 코끝이 얼얼하도록 쏟아져 내리던 시멘트도 이젠 멈췄다.


펌프는 서서히 길게 뻗었던 코를 거두었다. 스스로를 4번으로 착착 접었다. 기사는 시멘트 독이 무서운지 호스로 샅샅이 물청소를 했다. 구름의 엉덩이라도 간질일 듯 우람하게 쭉 뻗었던 콘크리트 펌프. 어느새 얌전한 작은 장난감 같은 차로 변신하더니 휭, 하고 떠나가버렸다.


3. 컨테이너의 포스터


경기도 파주시 서패동 475-1번지의 대지 200평. 이 작은 지구의 표면에는 지난 2달 여 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변화였다. 해마다 몸을 새로 갱신하며 터를 차지하던 한해살이 혹은 두해살이 풀들을 쫓아내고 딱딱한 물건들이 들어섰다. 바닥면적 100평에 지하 1층, 지상 4층, 건평 335평의 건물이 골조를 거의 완성한 것이다.


그 작업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정확한 구역을 위해 또한 비산먼지와 소음을 방지하기 위해 펜스를 쳤다.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간이화장실, 함바집 등이 임시로 건설되어 최소한 주거기능이 갖추어졌다.


건설은 망치로 못을 박고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붓는 것으로 다 되는 건 아니다. 그것들이 설계된 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수록된 도면은 한 권의 두꺼운 책이었다. 우리 몸의 비밀이 DNA에 들어 있듯 우리 건물을 짓는 방법이 그 책 안에 들어 있었다.


그 책을 해독하는 일, 다시 말해 도면을 읽은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컨테이너 안이었다. 말하자면 건물을 짓는 지휘부가 차려진 셈이다. 물론 쪼가리 도면은 작업 현장에 곳곳에 붙어 있다. 작업자들이 현장에서 적용하면서 별도의 표시를 복사도면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그 컨테이너 내부도 변화의 물결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현장을 책임지는 소장님의 책상과 회의용 테이블에는 그 커다란 도면이 늘 펼쳐져 있었다. 한곳에는 작업현황판이 붙었고 매일의 날씨를 체크하는 기후판도 있었다.


이 황량한 터에 자리잡은 컨테이너는 처음에는 내부도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사무실이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그것은 기초공사를 끝내고, 철근을 올리고, 점점 건물이 형태를 갖추어나가는 것과 거의 병행해서 일어나는 변화였다. 먼지와 땀, 도면과 칠판 등에서 여러 사람들이 어울린 흔적들이 배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사장이라고 그런 거친 환경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사무실 문을 열고 보니 이제까지 와는 사뭇 다른 포스터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한때 뭇청소년들의 방을 장식했던 연예인 사진 못지않게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아리따운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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