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 오페라



‘읽기 위한 드라마’라고 할 만큼 상연이 불가능한 『파우스트』의 이상을 완성한 말러의 교향곡 제8번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근대 독일 문학의 완성자이다. 시와 희곡, 소설에 걸친 그의 업적은 18세기 말까지 변방에 불과했던 독일을 유럽 문학의 당당한 일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독일식 고전주의를 정의했고, 낭만주의의 물꼬를 열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독일의 음악가들에게 풍부한 수원을 제공했다.


『이탈리아 여행』이나 『시와 진실』과 같은 자전적인 글에 따르면, 괴테는 모차르트를 가장 뛰어난 작곡가라고 생각했다. 오페라 <돈 조반니>와 <후궁탈출>을 특히 좋아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신을 존경한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무시했고, 대신에 지금은 거의 무명이 된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와 같은 작곡가를 높이 샀다. 괴테는 음악에 무지했던 것일까?


괴테는 음악을 극장의 시녀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연극의 사명을 위해 작동해야 할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 여겼다. 이는 실은 비단 괴테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빅토르 위고나 알렉상드르 뒤마와 같은 19세기 프랑스의 문호들 역시 자신의 작품을 음악가들이 마음대로 자르고 바꾸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모든 것이 오페라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이탈리아의 사정만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때문에 괴테의 원작은 작곡가가 손대기에 녹록치 않았다.


특히 『파우스트』는 모든 예술을 끌어 모은 대작으로, 그 자체가 종합예술인 오페라였다. 방대한 분량을 공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괴테 자신조차 ‘읽기 위한 희곡’(Lese-drama)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것이 작곡가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독일에서는 『파우스트』의 불가사의한 무대를 연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추상적인 음악으로 다루는 경향이 대세를 이뤘다. 슈만은 <괴테 파우스트의 장면들>(1844-53)이라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했고, 리스트는 <파우스트 교향곡>(1857)을, 구스타프 말러는 교향곡 8번(1906)을 통해 대작에 다가갔다.


독일 작곡가들의 특징은 『파우스트』 가운데 가장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2부의 마지막 장면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비교적 무대화하기 수월한 1부를 오페라로 작곡하려는 시도가 잇따랐다. 프랑스에서는 제라르 네르발이 원작을 멋지게 번역했고, 괴테도 이를 칭찬했다. ‘그레트헨 비극’으로 불리는 1부는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순수한 처녀 그레트헨과 사랑에 빠지나, 마성을 눈치 챈 그레트헨이 숭고한 죽음을 택함으로써 다시 방황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구노의 <파우스트> 가운데 파우스트의 카바티나 ‘정결한 집’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는 자신의 <파우스트의 천벌>(1846)을 ‘극적인 이야기’(dramatic legend)라고 불렀다. 그 또한 괴테의 기상천외한 무대를 상연하기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고안한 곡이다. 그러나 베를리오즈의 선구적인 업적은 불행히도 프랑스에서 이해받지 못했다. 오페라도 오라토리오도 아닌 기이한 작품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베를리오즈의 거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당시 기준으로는 과대망상과 같은 것이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를리오즈의 후배 샤를 구노(1818-1893)는 좀 더 현실적이었다. 1859년에 초연한 오페라 <파우스트> 역시 괴테의 1부만을 가지고 쓴 작품이다. 원작의 구성을 비교적 충실히 따랐을 뿐만 아니라, 구노는 당대에 가장 감미롭고 친숙한 음악을 쓰는 작곡가였다. ‘쥐의 노래’, ‘황금 송아지의 노래’, ‘꽃의 노래’, ‘툴레의 왕’, ‘보석의 노래’는 단독으로도 자주 불리는 아리아들이다.


베를리오즈와 구노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앙브루아즈 토마(1811-1896)도 괴테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작곡가이다. 구노가 <파우스트>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문학사의 두 걸작을 오페라로 만든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토마 또한 오페라 <미뇽>(1866)과 <햄릿>(1868)을 통해 괴테와 셰익스피어에 빚을 졌다.


<미뇽>은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바탕으로 쓴 오페라이다. 토마는 소설 가운데 비운의 소녀 미뇽의 이야기를 떼어냈다. 이때 괴테의 원작을 그대로 쓰지 않고 각색한다. 원래 미뇽은 하프 타는 노인의 사생아로, 낭만성을 상징하는 자유분방하고 순수한 소녀이다. 오페라에서는 하프 타는 노인이 로타리오라는 다른 인물로 바뀌며, 마지막 역시 미뇽이 안타깝게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빌헬름과 맺어지는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괴테가 알았다면 펄쩍 뛸 노릇이었지만, 토마의 좋은 음악 덕에 <미뇽>은 1894년에 1천 회를 돌파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토마는 작곡 솜씨에 비하면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크, 랄로, 비제, 포레와 같은 후배들을 보듬지 못했고 때문에 그릇이 좁은 사람으로 치부되어 점차 그 음악도 빛이 바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87년 5월 25일 오페라 코미크에서 <미뇽>이 공연되던 중에 극중에서와 같은 화재가 실제로 발생해 71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뒤로 토마와 <미뇽> 모두 사양길에 들어선다.


마스네의 <베르테르> 가운데 ‘그녀의 남편은 다른 사람’




괴테를 향한 프랑스 음악가들의 사랑은 쥘 마스네(1842-1912)로 정점에 이른다. 1891년에 완성된 <베르테르>는 그 유명한 질풍노도기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가지고 썼다. 마스네 또한 스승인 토마와 같이 괴테의 원작을 각색했다. 로테는 숨을 거두기 직전의 베르테르에게 미처 고백하지 못한 사랑을 얘기하며 입을 맞춘다. 그녀의 슬픔에 아랑곳없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성직자조차 부르지 못한 쓸쓸한 장례식으로 끝을 맺는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마스네의 오페라가 통속적으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깊이 있는 음악 때문이다. 마스네는 1886년에 바그너 성지인 바이로이트를 다녀오면서 그의 음악에 깊이 기울었다. 서정과 열정이 공존하는 <베르테르>는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낭만주의가 만나 그 절정을 이룬 좋은 예이다.


위대한 예술이 다른 장르로 옮겨질 때 원작의 깊이에 다가가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괴테와 같은 거인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다. 괴테를 다룬 오페라들 또한 그런 한계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작곡가들(특히 독일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프랑스의)은 그와 같은 제약을 명확히 인식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오페라라는 장르의 가능성을 극대화했다. 덕분에 오히려 괴테의 원작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음악팬들의 행운이다.



ⓒ 정준호. 2013. 0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