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하는 사람들, 현장을 방문하다 - 건축 일기 10


흙 한 숟가락 속에 수억 만 마리의 미생물이 산다는데 포클레인이 가볍게 집어드는 한 주먹에는 대체 얼마만한 생명이 있을까. 제 집으로 알고 그간 무탈하게 살아온 한해살이풀과 여러해살이풀 들의 씨앗은 또 얼마나 될까. 또한 무시로 드나들었던, 혹은 웅크리고 앉아있는 곤충이며 벌레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갸륵한 자비심일지라도 이번만큼은 애써 눌러 덮어야겠다. 부족하나마 이 정도의 세 문장으로 그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 갈음해야겠다.


여기에서 세세히 밝힐 수 없는 경로를 거쳐 궁리 사옥을 옮기기로 하는 결정을 했다. 물론 한 사람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궁리도 어차피 여러 사람들의 결사체(結社體)이니 만큼 모두의 총의를 모았다. 그리고 이제 시공사를 정하고 정식으로 계약한 지 어느덧 한 달.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들었으니 어찌되었던 올 가을이면 건물이 완성될 것이다. 지금은 형체도 없이 미미한 모습이지만 그게 완성되고 나면, 그것에 관계된 그 어떤 이보다도 이 지상에 더 오래 머무를 건물이겠다.


아직은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 건물 앞에서 ‘드디어 집을 짓는구나!’ 흐뭇한 표정을 지을 때 혹 그것이 실은 거대한 착각이 아닐까. 우리들보다 훨씬 더 오래 가는 건물이 저를 완성시키기 위해 몇 사람을 불러 모은 게 아닐까. 건축가의 창조적 아이디어와 감리, 시공사의 튼튼한 자재와 기술, 이를 지휘하고 조율하는 건축감독의 열정 그리고 이를 감당하는 건축주의 경제적 비용들. 이 모두가 실은 이 건물을 위해서 마련되는 것, 이 건물에 영혼이 있어 그가 이들을 불러 모아 함께 일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궁리 식구들은 오전 업무를 마치고 파주로 향했다. 이 건물에 실제 입주하여 때를 묻히면서 뒹굴고 살아야 할 것이기에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 태어날 건물과 잘 사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공사 현장은 차분했다. 어느 새 파일 공사가 끝난 상태였다. 설 연휴가 끝나마마자 명절날의 기름기 많은 음식들이 원기를 북돋았는지 파일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다. 이미 궁리 사옥을 들이기로 허락한 탓인지 땅도 마음을 푹푹 내주었던 것이다. 별다른 무리 없이, 작은 사고 하나 없이 파일은 시공회사의 뜻대로 지하로 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두더지도 땅 밑을 기면 제가 가는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파일은 무턱대고 그냥 내려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파일이 들어간 부피만큼 지하에서는 흙이 올라온 것이다. 그게 곧 땅의 속마음이기도 했다. 며칠 전 나의 속을 무던히도 애태우게 했던 흙이 부지 중앙에 쌓여 있었다.  멀리 심학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저 멀리 심학산의 지휘를 받고 있는 땅이다. 매립토, 퇴적토, 뻘층이 어우러진 그 흙은 포클레인이나 인부들이 일부러 저렇게 쌓아놓을 리는 만무였을 것이다. 보아라, 이 은밀한 내통(內通)을. 느닷없이 낯선 곳으로 끌려나와 이렇게 무리지을 때 심학산의 아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산을 쏙 빼닮은 형상으로 꼴을 갖추는 것을!


모든 작업을 끝내고 이제 본격 땅파기 작업을 앞둔 현장 한켠에 포클레인이 쉬고 있었다. 포클레인의 팔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끝은 무거운 것들을 홈으로 걸기에 맞춤하도록 꼬부라져 있었다. 그게 꼭 물음표 같았다. 세상에서 무겁고 큰 질문이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이 건축 현장에서는 저 파일을 하나씩 콕콕 찝어 올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렷다.


그 옆에는 보조 역할을 톡톡히 해낸 미니 크레인도 한쪽 팔을 땅에 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큰일을 해냈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만끽하면서 달콤한 휴식을 즐기고 있는 한 쌍의 기계장비들. 정밀한 고독이 주위에 가득 넘쳐 흐르고 있었다. 로댕의 조각에 기대어 “생각하는 포클레인”이라고 명명해 주면 퍽 어울릴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 옆으로 궁리의 사람들, 곧 궁리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궁리의 직원들은 여기가 처음은 아니었다. 부지가 정해졌을 때에도 이곳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제법 구체적인 일이 벌어진 현장에 서고 보니 느끼는 바가 다른 것 같았다. 모두들 흩어져 이곳저곳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살펴보았다. 킁킁 흙냄새를 맡기도 했고 툭툭 땅을 차보기도 했다.


궁리의 직원들은 파주출판 단지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궁리는 이미 10년 전에 출판 1차 단지에 잠시 세들어 입주한 적이 있었다. 그땐 제반 여건이 몹시 불비한 상태라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다. 모종의 인연으로 세든 건물은 그야말로 악조건이었다. 결국 6개월 만에 지금의 인왕산 아래로 옮기기까지 갖은 고난을 겪었다. 지나고 나서 그때 시절을 회고하면 그야말로 인간 진공청소기 역할을 한 셈이었노라고 할 정도였다.


궁리 사옥의 아이디어를 모을 때 직원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은 딱 세 가지였다. 유리건물은 피할 것.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할 것, 환기가 잘 될 것. 그런 경험이 있기에 우리가 원하는 건 보기에 좋은 건물을 넘어서서 살기에 좋은 건물!이었다.


건물이 들어서면 각자의 자리는 어디쯤일까. 2층 창문에서 바라보는 심학산은 어떤 모습일까. 그때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새로운 공간은 또 얼마나 새로운 감각을 가져다줄까. 각자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