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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집과 어깨를 견주다 - 건축 일기 26


우주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은 잠깐 누려본 호사였다. 그곳은 달의 표면은 분명 아니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 달 또한 둘일 수는 없었다. 어느 새 달이 둥실 떴다. 이곳은 지구가 맞다. 이곳은 지구의 한 표면을 담당하는 궁리사옥의 임시 옥상이었다.


둘러보면 어느 새 깜깜한 밤이 지배를 하고 있다. 가로등이 들어오고 등불이 몇 개 주위를 밝히긴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인적이 끊기고 자유로를 지나가는 차 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대낮의 굉음이 아니라 희미했기에 더욱 마음을 파고드는 소리. 휘황함이라든가, 흥청망청이라든가, 요란한 간판이라든가, 술잔 부딪히는 소리는 없었지만 이 동네의 고유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밤의 풍경이었다.


낮에는 그런대로 북적이다가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막한 공간으로 변하는 출판도시를 두고 죽은 공간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문득 삐까뻔쩍하는 도시적 풍경이 없으니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떠들썩하고 왁자해서 무슨 일이 곧 일어나야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만 살아 있는 느낌을 갖는 이들에게는 그러 할 법도 하겠다.


밤에 사람이 득실거리지 않는다고 죽은 동네는 아닐 것이다. 그런 식으로 따져서 고요한 시골동네를 아무도 죽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외려 그런 곳에 가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게 현대인이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점점 그런 현상이 느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추세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풍수학인인 최창조 선생과는 민음사 시절부터 인연이 깊다. 궁리가 처음 둥지를 튼 봉천동 시절에는 마침 선생의 댁이 길 하나 건너편에 있어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에 연재를 하던 원고를 신생 출판사인 궁리에 선뜻 건네주셨다. 그래서 나온 책이 “땅의 눈물, 땅의 희망”이다. 이 책에서 선생은 적는다. 좋고 나쁜 땅이란 없다. 자신에게 맞거나 맞지 않은 땅이 있을 뿐이라고.


조금 전의 낮하고는 자못 다른 풍경이 조금 낯설기는 했다. 여기서 밤을 보낸다면 외롭거나 쓸쓸하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이런 감정들을 어떻게 대접해 줄 것인가. 오로지 내 마음의 태도가 결정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고 콧구멍이 벌써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여기는 나에겐 맞는 땅이었다!


그렇게 흔쾌한 상상을 즐기는 것도 하룻밤의 여유일 뿐이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또다시 3층 벽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먹줄을 놓고 철근배근 공사가 진행되었다. 궁리건물은 통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다. 이제부터는 한쪽면에는 2개층이 올라가고 다른 한쪽면에 한 층이 올라가면 그만이다. 일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드디어 일부 면에서 거푸집을 떼내었다. 바닥면은 아직 그대로 두고 힘을 받지 않는 벽부터 콘크리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측할 수 없는 콘크리트의 품질이다. 전체적으로 고르게 나왔지만 군데군데 밀리고 자갈이 드러난 부분도 있었다. 콘크리트가 제대로 밑에까지 들어차라고 바깥에서 나무망치로 쿵쿵 때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오히려 물이 많이 빠져서 얼룩덜룩 콘크리트가 흠이 많이 생겼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상처 같았다. 이 모두는 한꺼번에 뒷마무리를 한번 해야 한다. 감독관은 건물 전체에 어차피 화장을 한번 해야 한다고 했다.


2층은 궁리 사무실이 들어설 공간이다. 이 건물의 주인들이 생활할 곳이다. 앞으로 이 건물과 인연을 지을 모든 이들에게도 꼭같이 적용되어야 하겠지만 건물은 지나가는 이들보다는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지난 설 연휴 때의 일이다. 우연히 어느 케이블에서 인문학 강좌를 보게 되었다. 김용관 건축사진가의 강의였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채널을 홱 돌렸을 텐데 건축은 함부로 대하는 주제가 이미 나에겐 아니었다. 이날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보스턴의 어느 아파트 주민들은 그 아파트가 준공되고 25년 후에 건축가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동안 살게 되면서 너무나도 자신들을 배려하여 설계한 것을 몸으로 느끼고 그 고마움을 전달한 것이었다. 짐작컨대 그 건축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뜻깊은 상(賞)을 받은 것이리라.


우리 건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점점 그 편리를 체득할 수 있는 건물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작은 집 짓기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합작품이어야 한다. 건축가가 건축주한테 밀리면 집장사의 집밖에 안 된다. 반대로 건축가의 고집만 앞세우면 집이 아니라 작품이 된다.” 시사인에 연재하는 칼럼에서 만난 대목이다.


마음을 정하고, 건축가를 만나고, 설계를 하고, 감독관을 초빙하고, 시공사를 정해서 오늘까지 오는 동안 많은 감회가 있었다. 실수도 있었고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 와중에서도 나에게 변하지 않는 분명한 생각은 있다. 바깥에서 보는 건물의 외부풍경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안에서 보는 건물의 내부풍경은 더욱 중요하다. 작품이란 바라볼 때는 좋겠지만 그 안에서 살자면 그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벽을 올리기 전에 궁리의 주간과 디자이너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우리 같은 날씬한 몸에 바닥이 꺼질 리는 없을 테고, 유리창에 대해 실제로 점검을 하기 위함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서울에서야 그렇다치고 파주의 풍광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는 마당에 안에서도 바깥을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 화천에 있는 이외수 소설가의 감성마을에 간 적이 있다. 그날 선생과 함께 응접실에 푹 퍼질러 앉았는데, 앉아서도 바깥이 훤히 보였다. 창문을 지면으로 확 끌어내린 것이었다. 비가 오면 빗소리는 물론, 빗방울은 물론,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은 물론, 하늘에서 오는 비에 얼굴을 말갛게 씻은 모래알이 개불알풀에 폴짝 들러붙는 것마저도 환히 보이도록 만든 유리창!이었다.


궁리 건물은 그렇게까진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의자에 앉았을 때 어깨와 바깥을 견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수평으로 바깥 풍경과 눈높이가 나란히 맞도록 하면 좋겠다. 도면을 보니 제법 큰 창이었는데 바닥에서부터의 높이가 1200센티미터. 여직원들에게는 조금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유리창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높이, 900센티미터로 조정하였다.


2층의 궁리 사무실에서 나오면 바로 바깥의 데크로 연결된다. 제법 널찍한 공간이고 앞에는 작은 습지가 있고, 전원주택형 아파트인 헤르만하우스가 코앞이다. 갓 물이 오른 새잎을 단 나무들이 무성했다. 심학산과 어울려 경치가 아주 좋았다. 오늘은 각종 자재로 어수선하지만 나중 완성이 되면 이 자리가 명당이 될 것도 같았다.


바로 그 곁의 상수리나무 가지에 까치집이 있다. 첫삽을 뜰 때부터 항상 내 관심을 받았던 선배 토착민이다. 이미 둥지를 튼 까치에 비해 언제 따라잡을까 했는데 2층 데크에 서고 보니 어느새 까치집과 어깨를 견줄 만 했다. 이제 곧 같이 반상회를 할 날도 멀지 않았구나, 까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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