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세상일이란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돌이켜보면 그저 간신히 사무실 하나 운영하는 마당에 언감생심 사옥(이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산에 갈 때 정장 차림하고 가는 것 같은 형국이라 이 단어가 몹시 불편하다!)을 짓는다는 게 주제넘은 짓이란 생각도 들었다. 엉겁결에 파주2차 단지에 조합원으로 가입은 했지만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 말고도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차고도 넘쳤다. 만약 내가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졌더라면 아마 나는 조합원을 탈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자는 그런 기회마저도 가질 자격이 없었던가 보다. 파주출판도시에 조합원이되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2011년 가을이 오고 추석을 앞둔 어느 날. 느닷없는 벨소리가 나기에 받고 보니 출판단지의 이기웅 이사장님의 전화였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출판에 입문하기 전부터 작은 인연이 있는 분이었다. 늘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해 주시기도 했지만 또한 까마득한 분이라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갑자기 여러 정황이 떠오르고 그동안의 무관심에 대한 자책하는 기분이 자연스레 들면서 주눅이 먼저 들고 말았다. 몇 가지 안부를 챙겨주시면서 하시는 말씀. “이 대표. 이달 말 일본 삿포로로 건축기행을 가는데 우리 함께 같이 가는 게 옳지 않겠소?”
그리하여 엉겁결에 따라나선 여행. 인천공항에서 치토세 공항으로 도착한 이후, 디자인 프로젝트 공원인 모에레누마 공원, 19세기말 창고를 리모델링한 오타루시의 운하창고, 오타루의 오르골당, 실낙원의 작가인 와타나베 준이치 문학관(안도 다다오의 작품) 등을 둘러보았다. 호텔에서는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인 후미코 마끼 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강연 제목이 ‘도시와 건축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나고 보니 이날 세미나에서 경청한 내용이 궁리건축에 희미하게나마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마지막 날에는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들러 맥주 맛을 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에서 우리 블록의 건축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성균관대학교의 석좌교수이고, 도시건축을 운영하는 조성룡 선생님. 명성이야 익히 들은 바 있고, 그간 공공건축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가 대단한 분이었다. 특히 과거의 정수장을 리모델링하여 새로운 생태공원으로 변모시킨 <선유도 공원>이 대표작이다.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이고, 건물에 대해서도 시큰둥하던 나였지만 건축가는 제대로 만났구나, 하는 느낌을 진실로 가졌다. 블록별 모임을 가진 어느 선술집에서 선생님이 툭 던지는 말씀. “이 대표. 무엇보다도 건축주도 공부를 해야 됩니다.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
이 뜻밖의 건축여행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고 의외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두들 여유를 갖고 출판도시에 입주를 준비하는 줄로 알았는데 대부분 나와 비슷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아무튼 이번 여행을 통해서 출판도시에서 기회만 되면 도망가려던 마음을 다시 한 번 재고해보는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삿포로는 눈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우리가 다닌 동안은 가을이라 한 톨의 눈 구경은 할 수 없었다. 내 눈을 끈 것은 거리의 가로수였는데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아마도 마가목인 듯했다. 울릉도나 설악산 등의 정상 부근에 가면 마가목을 볼 수 있다. 사나운 바람을 맞고 휘청거리면서도 세월을 견디고 있다. 이 건축기행에서 언젠가 혹 탄생할 궁리의 건물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았다. 저 나무 같은 집!
이 뜻밖의 여행에서 거둔 뜻밖의 수확은 하나 더 있다. 노보텔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는데 로비 한편에 신문가판대가 있었다. 무료로 보는 신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1면의 헤드라인이 눈길을 끌었다. 정치가 아니라 과학기사가 아닌가. “빛보다 빠른 소립자 관측. 뉴트리노 상대성이론과 모순.” 그래서 적어본 한 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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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 지나고 두 주일 후, 2차 파주출판도시 조합원들과 건축가들이 삿포로로 건축 기행을 갔다. 모름지기 사내란 자기 이름 걸고 집 하나 지어 보아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 터수가 아니래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사옥 하나 갖는 게 좋은 일인 줄을 누가 모르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를 생각하면서 신발 끈도 조이고 안목도 키우기 위함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 먹으러 가는 길. 호텔 로비 한켠에 <요미우리신문>이 비치되어 있었다. 나의 일본어 실력은 한자와 조사를 중심으로 겨우 읽어 내는 정도이다. 히라가나가 길게 이어지면 건너뛰어야 하는 게 내 빈약한 독해법이다.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헤드 타이틀이 눈길을 끌었다. “빛보다 빠른 소립자 관측. 뉴트리노 상대성이론과 모순.”
첫 대목을 더듬더듬 읽어 보았다. “나고야 대학 등의 국제 연구 그룹은 23일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의 일종인 뉴트리노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달리는 관측 결과를 발표하였다. 현대물리학의 기초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다. 이번 결과는 이 이론과 모순되는 것으로 관측 결과가 사실이라면 물리학의 근본이 뿌리째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
나는 빛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 이번 건축 여행도 실은 관광(觀光)이다. 즉 빛을 보는 것이다. 삿포로 맥주 캔을 때리고 튕겨 나오는 빛이 있기에, 그 빛이 내 좁은 눈으로 들어오기에, 나는 삿포로 맥주를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종내에는 흘리지 않고 한 모금 홀짝일 수 있는 것이다. 여행 도중 여러 관광지에서 사진을 제법 많이 찍었다. 카메라는 광학(光學)기기이다. 그게 아무리 최고급인들 빛이 없다면 그냥 등신에 불과하고, 멋진 사진 또한 빛들의 장난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몸도 먼지들의 집적(集積)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를 구성하는 이 물질, 손으로 잡으면 뭉툭하게 잡히는 나의 이 육체. 이 또한 우주의 먼지가 특별하고 긴밀하게 잠시 집합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장작을 태우면 빛과 열을 방출하고 재로 변하는 것처럼 합당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된다. 그러니 나를 구성하는 이 허망한 먼지 물질들도 언젠가 산산이 흩어지고 빛으로 사라질 것이다. 오직 그때까지만 ‘나’라는 건축물을 임시로 유지하는 중인 것이다. (........)
이번의 뉴트리노 실험 결과가 해프닝이 아니라고 확인되면 물리학계뿐만 아니라 세상은 엄청난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내 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금의 인식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인식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검증 불가능한 사고실험(思考實驗)에 기반을 둔 가설이 아니라 <금강경(金剛經)>}을 이루는 글자만큼이나 단단하게 뭉친 확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시인이 있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강제수용 당하기도 하고, 막걸리와 담배 한 갑으로 하루를 버틴 시인 천상병(1930~1993). 시인은 때가 오자 시 한 수를 남기고 귀천하였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그리고 또 한 시인이 있다. 작가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곡기를 끊고 소주로만 연명하다가, 봇물 터지듯 300여 편의 시를 토해 내고 세상을 버린 비운의 시인 박정만(1946~1988). 시인은 지구를 떠나면서 열다섯 글자의 절명사를 마지막으로 읊었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아무리 상대성이론이 구축한 세계가 붕괴된다 해도 시인들이 외친 저 늠름한 시적(詩的) 진실에는 티끌만한 흔들림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빛보다 빠른 물질. <경향신문> 2011. 12. 9일자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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