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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③_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이슬람의 악마화

팔레스타인 유대국 건설을 둘러싼 견제들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운 사우드 일족은 원래 노상 강도로 살아가던 집단이었다. 마적단이었던 사우드는 같은 이슬람교도 사이의 싸움을 엄금하는 이슬람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초강경 극보수 교리에 조금이라도 동의하지 않는 이슬람교도를 무조건 배교자라며 처단하는 와하비즘에 매료되었다. 와하비즘 교리는 같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약탈을 정당화해주었다. 이슬람 성지 메카, 메디나를 포함해서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직간접적으로 통치하던 오토만제국에게 사우드-와하브 결탁은 제국을 좀먹는 독버섯이었지만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 북인도까지 방대한 영토를 거느린 오토만제국을 잠식하기에 골몰하던 영국에게는 제국 팽창의 우군이었다. 영국은 인도와 중동을 잇는 교역항으로 급성하던 쿠웨이트에 눈독을 들이고 1755년, 1775년 두 번 집적거렸지만 점령에 실패했다. 그러나 사우드와 합세하여 1788년 쿠웨이트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동인도회사를 아예 쿠웨이트로 옮겼다. 유럽 최고의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영국을 등에 업고 사우드 세력은 무자비한 살상극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휩쓸면서 1803년에는 메카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오토만제국은 이집트 총독을 앞세워 1812년 메카를 탈환했다. 사우드는 반격을 시도했지만 세부족으로 영국의 비호 아래 쿠웨이트를 둥지로 삼아 훗날을 도모했다. 19세기 중반 아시아와 중동에서 영국의 가장 큰 맞수는 러시아제국이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1862년 농노제를 폐지하면서 러시아 개혁에 앞장섰다. 유능한 장군들을 앞세워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무섭게 영토를 늘려갔다.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아야 했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면 비록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을지언정 오토만제국을 밀어야 한다는 것이 영국의 입장이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이 오토만제국을 부추겨 러시아와 크림전쟁을 벌인 것도 러시아 견제 차원이었다. 부동항 부재로 고심하던 러시아는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두 해협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를 차지하려고 여러 번 오토만제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영국의 완강한 반대에 번번히 좌초했다. 유럽의 ‘병자’로 조롱받던 오토만제국이 무섭게 세력을 키워가던 러시아의 공세 앞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패권국 영국이 뒤에서 밀어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1차대전 전야는 상황이 달랐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는 유대국 건설을 도모하는 시온주의 운동이 불붙었고 로스차일드 같은 거부를 등에 업고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오토만제국에 요청했지만 오토만제국은 거부했다.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도 중요한 성지였다. 러시아제국을 젖히고 영국의 가장 큰 패권 경쟁국으로 떠오른 독일제국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제 영국의 대외 정책에서 러시아 견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팔레스타인 양도를 거부하는 오토만제국을 지켜줄 이유도 없었다. 아니, 전쟁 승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군자금의 안정된 조달을 위해서는 로스차일드 같은 거부의 숙원이었던 팔레스타인 유대국 건설을 성사시켜야 했고 그러자면 오토만제국을 전쟁에 끌어들여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1차대전 직전 영국은 오토만제국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수주한 두 척의 거대한 군함을 완성했음에도 오토만제국에 넘기기를 거부했다. 쇠락해가곤 있었지만 오토만제국은 아직 방대한 영토와 자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영국은 오토만제국을 독일과의 전쟁에서 우군으로 끌어들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영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거액을 받고 만든 군함의 인도를 거부하면서까지 오토만제국을 자극했다. 오토만제국이 독일 쪽에서 싸우기를 바라지 않고서야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결국 오토만제국은 독일과 손잡았다. 아랍인이 이슬람의 기치 아래 뭉치는 것을 방해한 영국 1차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오토만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아랍인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오토만제국의 지배층은 터키인이었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는 아라비아의 메카, 메디나였는데 당시 이곳은 이스탄불의 오토만제국 최고 수장 칼리프가 현지의 아랍인 왕족 후세인을 사실상의 총독으로 앉혀 통치를 맡겼다. 그런데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후세인은 전쟁이 끝나면 아랍인을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오토만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후세인은 이슬람교인들이 유일신 알라 다음으로 추앙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은 씨족이었고 이슬람교의 성지를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아랍인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후세인이 이끄는 반오토만 아랍군은 영국의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아랍의 독립을 약속한 바로 그해 1916년에 영국은 1차대전이 끝나면 아랍 세계를 나눠먹기로 하고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프랑스와 맺었다. 영국의 밸포어 외무장관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1917년 11월 팔레스타인 유대국 건설도 약속했다. 1차대전에서 오토만제국이 패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리아, 이라크까지 아랍인의 독립 국가 건설을 표방하고 오토만제국과 싸웠던 후세인 왕은 전쟁 뒤 영국이 자신을 이슬람권의 지배자로 인정해주리라 믿었을지 모르지만 영국의 생각은 달랐다. 아랍인이 이슬람의 기치 아래 뭉치는 것은 곤란했다. 피지배 집단을 ‘분열통치’ 곧 갈라치기로 다스려온 노련한 제국주의자 영국이 선호하는 파트너는 같은 이슬람교도라도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가차없이 죽이는 사우드 세력이었다. 무함마드의 피를 이어받은 후세인이 성지 메카에 건재하는 한 이슬람권은 언제 다시 결집할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지만 사우드가 군림하는 한 이슬람 세계는 하나가 되기 어렵고 영국의 후원 아래 팔레스타인에 들어설 이스라엘은 안전해진다. 사우드-와하비즘 세력은 영국의 비호 아래 40-50만 명의 이슬람교도를 죽이는 잔혹한 학살극을 자행하면서 후세인 세력을 몰아내고 메카, 메디나에 이어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차지했다. 그리고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했다. 그 뒤 사우디 아라비아는 엄청난 오일 달러를 무기로 멀리는 아프간, 방글라데시, 미얀마, 파키스탄, 필리핀에서 가깝게는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에서 선량한 이슬람교인을 살인과 살상에 눈이 먼 근본주의 광신도로 타락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리스 문화를 적극 받아들인 아랍 문화 이슬람 문명은 기독교 문명보다 일찍부터 훨씬 포용적이었고 개방적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뒤로 그리스 서적은 서유럽에서 급격히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슬람 세계는 벌써 8세기부터 그리스의 천문서, 지리서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의 저작까지 아랍어로 번역했다. 8세기 바그다드는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그리스 문화를 적극 받아들인 아랍 문화는 이베리아에 정착한 이슬람교인 곧 무어인을 통해 스페인까지 전해졌다. 스페인의 이븐 라슈드라는 법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해설한 주석서까지 냈다. 스페인의 톨레도는 11세기 후반 유럽의 십자군이 남진하여 처음 탈환한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유럽의 식자층은 톨레도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저작을 보고 경악했다. 아랍어를 배우려고 멀리 잉글랜드에서까지 순례자처럼 톨레도를 찾았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 문학과 서정시는 프랑스 남부에서 유래했지만 프랑스의 기사도 문학과 서정시는 안달루시아에서 오래 전 유행한 궁정연가가 원조였다. 여성을 순수한 사랑의 이상적 사랑으로 동경하면서 신분의 장벽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안으로 삭이며 고독 속에서 짝사랑을 지켜나가는 아랍의 궁정연가는 프랑스 남부의 서정시인들을 사로잡았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이 꽃피운 섬세하고 화려한 문명이 북아프리카의 거친 아랍 왕조들에게 휘둘리게 된 것은 위에서 밀고 내려오는 유럽 십자군의 무력을 자력으로 막아내기 어려웠던 문약한 무어인이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면서부터였다. 기독교 성지 팔레스타인을 탈환을 내걸고 동진한 유럽 십자군은 엄청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십자군에게 점령당한 이교도의 땅은 생지옥이 되었다. 십자군은 아기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러나 살라딘 같은 이슬람 지도자는 점령지에서도 기독교도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적지 않은 십자군이 기독교의 야만성과 이슬람의 문명성에 충격을 받고 이슬람에 귀의했다. 1492년 스페인 통일과 함께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관대하게 받아들인 것도 오토만제국이었다. 오토만 치하에서 유대인은 두브로브니크, 사라예보, 베오그라드, 소피아,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교의 자유를 한껏 누렸다. 오토만제국에서 유대인의 중심 도시는 마케도니아의 살로니카였다. 인구 십만 명 중 80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1454년 무렵 오토만제국에 살던 유대인 랍비 이사크 사르파티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핍박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오토만제국에서는 유대인임을 드러내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며 저주받은 땅 유럽을 떠나 이리로 오라고 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17세기 우크라이나에서 코사크가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을 때도 오토만제국은 유대인 피난민을 수용했다. 서양식 활판인쇄술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1493년에 간행된 책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나온 히브리어 법률서였다.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 페즈에서 역시 유대 기도서가 1516년에 처음 간행되었다. 모두 이슬람 통치자가 다스리던 곳이었다. 서유럽에서도 1470년 로마에서 처음 히브리어 서적이 간행되었고 이후 여러 곳에서 책이 나왔지만 많은 곳에서 감시받았고 때로는 심한 억압을 받았다. 유대인은 기독교 십자군에게 집단 학살당하기 일쑤였지만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되찾은 뒤 유대인은 다시 유대교당에 드나들 수 있었다. 이슬람이 폭력과 야만의 대명사로 낙인 찍힌 것은 사우드 마적단과 와하브 광신도가 영국의 비호 아래 이슬람 세계 안팎을 짓밟으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악마화는 비이슬람 세계에서 더욱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1985년 4명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이 이집트 근해에서 이탈리아 유람선을 납치해 휠체어에 타고 있던 유대인 노인을 죽이고 바다로 내던진 사건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의 무장 투쟁 노선을 규탄하는 여론이 미국과 유럽에서 들끓었고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던 여론이 차갑게 식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정보조직 핵심부에서 일하다가 밀려난 아리 벤-메나셰가 1992년에 낸 <전쟁 벌이: 미국-이스라엘 비밀무기거래조직 내막>이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을 이끌던 아불 압바스는 될수록 잔혹한 사건을 일으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수백만 달러의 돈을 받고 이탈리아 유람선을 납치해서 유대인 노인을 죽였다. 그 돈은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의 공작금에서 나왔다.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일선 행동대원들은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납치도 하고 살해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테지만 조직의 상층부는 모사드에 접수당한 지 오래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학살한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 검은구월단의 조직원들은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하나둘 목숨을 잃었지만 조직의 수장 아부 니달은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로부터 어떤 위해도 받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이름으로 끔찍한 테러를 수없이 저질렀다.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무차별 살상극은 팔레스타인 투쟁의 정당성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슬람국가 건설을 내걸면서 기독교인이건 이슬람교인이건 닥치는 대로 죽이는 와하비즘 추종 세력의 만행 앞에서 다수 세계인이 이슬람에 공포와 혐오를 느끼게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그런 야만스러운 이슬람 세력에게 둘러싸인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이 특히 기독교인 사이에서 커져가고 테러와의 전쟁을 빙자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주권국 파괴 작전은 더욱 힘을 얻는다. 아랍 국가들의 분열과 갈등을 꾀하는 이스라엘에 맞서 인구 2700만의 예멘에서 2200만이 넘는 예멘인이 거처를 잃고 떠돌고 있다. 사우디와 서방의 항구 봉쇄로 의약품 공급이 끊겨 콜레라 환자가 창궐하는 데도 속수무책이고 내일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제주도에 온 수백 명의 ‘난민’을 만든 주범은 예멘인이 자기 땅에서 마음 편히 살 수 없도록 예멘을 침공하여 쑥밭으로 만들면서 무기 팔이로 떼돈을 버는 ‘란민’이다. 예멘 국민은 부패한 자국 정부에 맞서 봉기했지만 실은 사우디와 그 뒷배를 봐주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주변 아랍 국가들의 분열과 갈등을 끝없이 도모하는 이스라엘에 맞서 봉기한 셈이다. 그것은 예멘 전쟁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사우디 동맹군에게 군사 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렇지만 BBC를 비롯한 서방의 주류 언론은 예멘 전쟁을 외세 침공이 아니라 종파 갈등과 종족 갈등으로 불거진 내전으로 그리면서 사우디 동맹군의 개입을 예멘 자폭을 막으려는 고육지책으로 묘사한다. 종파 갈등과 종족 갈등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예멘 전쟁뿐 아니라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전쟁도 결과는 종파 갈등과 종족 갈등으로 귀결되었지만 원인은 외세의 유구한 분열통치 작전이다. 얼마 전 아빠를 따라 미국에 난민으로 들어왔다가 아빠와 헤어진 온두라스 아이의 우는 모습에 미국 여론이 들끓었다. 어린 아이를 부모와 갈라놓는 트럼프 미국 정부의 반인륜 행태를 많은 미국인이 성토했지만 그것은 과녁을 비껴간 분노다. 미국인이 분노해야 하는 것은 난민에게 가혹한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가난한 온두라스 일가족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까지 올 수밖에 없게끔, 다수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려던 온두라스의 민주 정부를 쿠데타 사주로 무너뜨린 미국 정보부의 공작이다. 끝없는 전쟁과 테러로 돈을 버는 ‘란민’과 그 하수인들을 정조준하지 못하는 한 ‘난민’은 앞으로도 자꾸만 쏟아질 것이다. 예멘 ‘난민’을 양산하는 예멘 침공 ‘란민’의 주범 중 하나가 한국과 군사 밀약을 맺은 아랍에미리트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한국이 예멘을 생지옥으로 만드는 ‘란민’의 하수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참고자료 1. Arabia Incognita, Sheila Carapico, 2016. 2. Two Faces of Islam, Stephen Schwartz, 2003. 3. Wahhabism: a Critical Essay, Hamid Algar, 2002. 4. Profits of War: Inside the Secret U.S.-Israeli Arms Network, Ari Ben-Menashe, 1992. 5. The Caliphate, the Hejaz and the Saudi-Wahhabi Nation-state, Imran N. Hosein, 1996. http://imranhosein.org/media/books/caliphate.pdf 6. https://dawlishchronicles.com/2017/04/07/the-powder-keg-russia-turkey-and-britain-in-the-mid-18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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