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하다 - 연극과 음악 2


영국보다 시장은 작지만 결코 수준이 낮지는 않았던 알프스 북쪽은 어땠을까.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에 이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라는 세계 연극사의 거인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아직 독서(讀書)의 저변이 넓지 않은 시대에 연극이야말로 민중을 계몽할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오페라는 소수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흥행에 좌우되는 극장 시스템이 아닌 궁정과 귀족의 자택에서 소비되는 값비싼 사치였다.


그때 모차르트(1756-1791)가 나타났다. 그는 독일인(작은 의미로 오스트리아)이었지만 이탈리아 작곡가보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모차르트로 인해 종합예술인 오페라를 주도하는 예술가는 음악가가 되었다. 흔히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1786)을 가리켜 신분 질서의 모순에 의문을 제기해 프랑스 혁명을 예견한 문제작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같은 맥락으로 <마술피리>(1791)는 프리메이슨 결사의 이념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설령 모차르트에게 그런 이념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이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혁신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연극과 음악이 결합한 징슈필, <마술피리>




모차르트는 바흐가 종교 음악에서 이룬 경지를 무대 위에서 재현했다. 그 경지란, 보통 사람의 귀를 만족시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정해 놓은 목표, 곧 가장 높은 이성이 작동하는 위치까지 올려놓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마지막 작품 <마술피리>에서 모차르트는 연극과 음악을 결합한 ‘징슈필’(Singspiel)이라는 음악극으로 나아갔으며, 이를 위해 오페라라면 당연히 이탈리아 말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민중을 위한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모차르트 덕분에 오페라는 소수의 점유물이 아닌 만인의 특권이 되었다.


모차르트는 극장의 선배인 레싱이 연극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 1779)에서 주고자 한 교훈을 확실히 이해한 음악가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십자군 원정 때의 예루살렘이 무대이다. 이슬람을 넘어 기독교 국가에까지 성군(聖君)으로 이름을 날린 술탄 살라딘은 유대의 랍비 나탄에게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중 어느 편이 진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 나탄은 이에 대한 대답 대신 반지의 우화를 들려준다.


어느 문중에 가보로 내려오는 반지가 있어, 현명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아들이 나이에 관계없이 반지를 상속받도록 되어 있다. 어느 대에 이르러 아들을 셋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총명하고 심성이 바라 하나만 좋아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죽기 전에 보석상에게 부탁해 자기 반지와 똑같은 것을 두 개 더 만들어 달라고 한 뒤, 이를 세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세 아들은 각자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주장했고 급기야 법 앞에 섰다. 판결을 맡은 재판관은 반지를 가지고 서로 헐뜯는 것을 보니 모두 원래의 신통력을 가진 반지가 아닌 가짜라고 판결했다. 그렇지 않다면 돌아가 반지가 가르치는 우애와 화목을 도모하라는 것이 재판관의 선고였다.


곧 나탄은 살라딘 왕에게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중 어느 쪽도 단독으로는 절대 진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자신의 종교가 참되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얘기한다. 모차르트가 좀더 살았더라면 레싱을 대본으로 오페라를 쓸 수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아마 희곡의 내용처럼 모차르트의 작품도 음악, 연극, 무용 어느 쪽도 단독으로는 우주의 조화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무대와 영상의 환상적인 결합을 보여주는 베를린 코미셰 오페라의 <마술피리>




재미있게도 레싱이 현자 나탄의 모델로 삼은 사람은 바로 ‘독일의 소크라테스’라 불렸던 유대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이다. 모제스 멘델스존의 아들이 은행가가 된 아브라함 멘델스존이고 다시 그의 아들이 바로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이다. 그는 음악가 가운데 연극에 대해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저택에서는 때때로 각종 연극과 음악회가 열렸고, 셰익스피어는 모두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어린 펠릭스는 이미 열일곱 살 나이에 연극을 위한 서곡을 썼고, 만년에는 연극 중간 중간에 연주할 부수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다시 펜을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결혼식마다 울려 퍼지는 ‘축혼 행진곡’은 이렇게 탄생했다.


20세기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이 그린 <한여름 밤의 꿈>




멘델스존의 연극적 사명(使命)은 프랑스에서는 조르주 비제(1838-1875)에게, 노르웨이에서는 에드바르 그리그(1843-1907)에게 계승되었다. 비제의 <아를의 여인>(1872)은 알퐁스 도데(1840-1897)의 동명 희곡을 위한 극 부수음악이었고, 그리그도 헨리크 입센(1828-1906)의 <페르 귄트>(1876)를 위해 부수음악을 만들었다. 둘 모두 오늘날 두 사람의 많은 음악 가운데 큰 사랑받고 있다. ‘극 부수음악’(incidental music)이란 오늘날 영화에 덧입혀지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과 같은 것을 말한다. 전체 연극의 분위기를 요약해주는 서곡과 막간에 연주하는 간주곡, 주요 독백을 위한 아리아, 군중 장면을 위한 합창까지 더해지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르네상스 시대에 꽃피운 오페라의 정신이 면면히 살아 흐르는 시도였다.


브람스의 친구이자 바그너의 동료였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1830–1894)는 마이닝겐 궁정 극장에서 이런 작업을 계속해 갔다. 독일의 작은 공국이었던 마이닝겐의 영주 루트비히 2세는 ‘극장의 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연극에 애정을 쏟았다. 그는 레퍼토리를 정착시켰고, 현대 연극의 효시가 되는 연기(演技)를 제시했으며, 무대 기술을 혁신했다. 마이닝겐 앙상블의 셰익스피어와 입센은 전 독일 극장으로부터 초대를 받았고, 러시아의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와 같은 현대 연기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연수를 받았을 정도였다. 지휘자 뷜로와 그의 악단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 정준호. 2013. 06.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