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줄을 놓다 – 건축 일기 14


비는 하늘에서 오는 물질이다. 아마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비를 본 것은 포대기 속에서였을 것이다. 그땐 어머니 몸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정수리의 뚜껑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하늘과 통하는 문이 그런대로 얇은 막처럼 꿀렁꿀렁했던 것이다. 그 이후 숱하게 비를 바라보았고, 더러 맞기도 했다. 이젠 머리통도 단단해졌고 하늘로 가는 기운도 차단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나. 비는 그저 물일 뿐. 이젠 비가 와도 놀라지 않는다.


건축을 시작하고 땅을 판 뒤 처음으로 비가 왔다. 지난 설 연휴에도 잠깐 오기는 했었다. 그건 어차피 쉬는 날에 만난 비였다. 공사장에 비가 오면 많은 일이 생긴다. 불편해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현장에 떨어지는 비는 비누 같은 역할을 한다. 자재들의 표면을 한없이 미끄럽게 만든다. 물의 표면장력으로 동그랗게 맺히는 물방울이 그렇게 만든다. 아차, 하다가 미끄러지는 것, 그건 비에 걸려 넘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니 당장의 경미한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공사장은 쉬어야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비를 보고 놀랐다는 뜻이다.


어느 분야에서건 날씨가 영향을 많이 미치겠지만 공사 현장도 그날의 날씨에 의해 많은 것들이 좌우되기 마련이다. 건축을 한다고 했을 때 주위로부터 들은 많은 충고를 들었다. 그중에서 장마를 피해라, 겨울을 넘기지 마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공사를 시작하고 보니 새삼 그 말이 실감이 났다. 큰 행사가 벌어졌을 때 날씨가 큰 부조(扶助)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비로소 나의 하루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날씨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앞으로도 차근차근 확인이 되겠지만 궁리가 2월에 공사를 시작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 추위는 작업자들의 손을 굳게 하고, 여름 장마는 공사장을 일시 휴업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뿐인가. 어렵게 만들어놓은 그 성과물의 품질도 결국은 날씨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급한 재료라도 제 성능이 발휘되려면 날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콘크리트가 얼어 터지는 것, 나사 하나를 제대로 돌리는 것, 먹줄을 솜씨 좋게 튕구는 것, 바닥에 그려놓은 그 먹줄이 지워지지 않는 것, 애써 파놓은 흙벽이 붕괴되지 않는 것, 적재해 놓은 파이프에 맺힌 물방울을 디뎠다가 자빠지지 않는 것…… 이 모두가 비와 전혀 무관치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하루를 지나고 비는 그쳤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지만 비온 뒤 흙의 색감이 더 뚜렷해진 느낌이었다. 콘크리트도 물기를 털어내고 깔끔하게 말랐다. 땅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물질이었을 콘크리트를 딱딱하게 만든 뒤 품으로 안았다. 선뜻 어울리지 않던 대비가 하룻만에 나름의 조화를 이루었다. 비는 그쳤지만 찬바람이 불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였다.


오전부터 두 사람이 버림 콘크리트 바닥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도면을 펼쳐놓고 자를 들이대고, 위치를 정하고 선을 그었다. 연필도 동원되었지만 점만 표시할 뿐 선은 먹줄로 튕겼다. 그 옛날 시골에서 목수들이 가지고 다니던 먹통과 같은 것이었다. 줄을 꺼내면 먹물이 흠뻑 묻은 먹줄이 나와서 탁, 튕기면 자동으로 바닥에 줄이 그어졌다.


건설 현장에서는 안전에 유의해서 작업자는 반드시 안전모를 써야 한다. 모자는 악세서리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전을 위한 필수장비이다. 한편 모자는 쓴 사람의 인상을 참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늙수구레한 사람을 단박에 훨씬 젊어보이게 하는 것도 모자이다. 여러 포즈를 취하며 다정하게 어울려 일하는 두 사람. 얼핏 보기에 모자 아래로 보이는 인상이 참으로 선한 게 얼굴도 서로 조금 닮은 것 같았다. 이제 막 제대라도 한 듯 분위기의 젊은이가 퍽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든 생각. 나이 차이도 제법 나는 두 사람은 혹 부자 사이는 아닐까?


공사장 한켠에 우두커니 서 있던 우주발사대처럼 높은 위용을 자랑하던, 파일을 때려박느라 힘을 불끈불끈 자랑하던 포클레인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궁리 바로 옆에서도 곧 공사가 시작하는데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긴 팔을 착착 구부리고 접자 평범한 불자동차처럼 변신하였다. 며칠 간 이 공사현장을 장악하고 큰일을 해낸 포클레인은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처럼 훌쩍 궁리사옥 현장을 떠났다.


한편 또 한쪽에서는 임무 교대하듯 크레인이 등장해서 철근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식명칭이 이형도강인 철근이 한 움큼씩 밧줄에 매달려 바닥으로 배치되었다. 건물의 뼈대가 될 묵직한 철근이 속속 들이닥친 것이다. 이제 철근들은 버림 콘크리트 위에 먹줄로 표시한 대로 벽과 바닥, 계단 등 건물의 요소요소에 들어가 배열된다. 그리하여 건물이 건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나누어 짊어질 것이다.


낭창낭창하지만 그 힘이 대단하고, 날카로우면서도 그 지탱력이 엄청난 철근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였다. 이제 저들이 꼿꼿하게 일어나 자리를 잡으면 그게 바닥이 되고 벽이 된다. 그래서 공간이 태어나 방을 만들고, 계단이 생겨나 이층, 삼층, 사층을 만든다. 굳은 시멘트와 철근이 가깝게 어울린 모습을 보는데 진짜 지금 내가 건축현장의 한 복판에 서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공사장도 마무리를 했다. 내일 작업에 필요한 철근도 모두 제자리를 잡았다. 이제까지 기계가 주로 작업을 했다면 앞으로는 사람들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 철근을 자리에 세우고 철사로 연결하고 고정시키는 건 인력으로 해야 한다. 내일부터 목수들이 본격 투입되어 배근 작업을 한다고 했다.


해가 저물면 이상하고도 고마운 현상이 생긴다. 아무리 흐트러지고 제멋대로 나뒹굴던 현장이 그렇게 그대로 질서가 딱 잡힌다는 사실이다. 그게 햇빛이 부족해서 시력 탓만은 아닐 게다. 어두워질수록 그 질서는 더욱 엄격해진다. 혹 저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한결 너그러워지는 마음 탓으로 그런 것일까.


사람과 사물의 분리가 일어나 바닥에는 이제 고요함과 넉넉함만이 고였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저 안의 모든 것들은 검은 어둠을 접착제로 삼아 콘크리트처럼 서로 단단히 들러붙는다. 어디가 어딘지, 무엇이 무엇인지 전혀 분간이 안 가도록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먹줄을 긋던 두 분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지금 묻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겠다 싶어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 “...........?”

--- “혹 젊은 분이 아드님 아니신가요?”

--- “.........제 조카입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