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근 | 처음 뵈었을 때부터 남다른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명함도 독특해 보입니다. “농사가 예술이다”라고 써놓으셨던데요. 이 슬로건은 언제 만드신 겁니까?
천호균 | 2008년 말에 서울디자인올림픽이라는 행사가 열렸는데, 그곳에 참여하면서 만들었습니다. 당시 주제가 ‘미래의 디자인’이었는데 저희는 다양한 곡식과 과일 자체를 작품으로 전시했지요. 다른 브랜드들은 현대 문명,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을 강조하려는 듯 보였는데, 저희가 중심에 둔 것은 ‘가치지향적인 미래’였습니다. 미래에 과연 무엇에 가치를 둘 거냐를 두고 회의한 결과 인류에게 제일 오래갈 수 있는, 먼 미래의 문명이란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가장 오래된 문명은 농사에서 비롯되지 않았냐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런 뜻을 농산물 전시로 선보인 셈인데요.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농산물을 예술적으로 잘 디자인하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 판단을 그때 할 수 있었지요.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말도 자신 있게 꺼낼 수 있게 됐고요.
명함에 썼을 만큼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말은 이제 제 인생에서 이름값과 동등한 무게를 갖게 됐습니다. 갈수록 농사는 삶을 아름답게 가꿔준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기업 ‘쌈지’를 운영해오면서 소외된 아름다움, 오래된 아름다움에 관심 있는 예술가들과 소통을 많이 해왔는데요. 이분들이 주로 농사, 농부, 농촌에서 영감을 얻더라고요. 생활은 고달프지만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기쁨, 혹은 이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운명 같은 것을 안고 작업을 하는데, 아마도 농민들에게서 비슷한 연민이나 동지의식을 느꼈나 봅니다. 예술의 변방지대에 있던 그들이, 산업화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난 농민의 삶을 주목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 변방의 삶 속에도 예술적 감성은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숨쉰다는 것을 확인했겠고요. 작가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는 예술이 자연스럽게 농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흙을 만질 때 예술적 감성이 길러진다,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구호 아닌 구호를 만들게 됐습니다.
이태근 | 농사를 지으면서 길러지는 예술적 감성은 도시나 산업화의 과정에서는 얻어지기 힘들지요. 제게도 농업이 예술이라는 것을 느꼈던 경험이 있는데 일본의 야마기시 마을에 갔을 때였어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전한 뒤 야마기시 미요조라는 농부가 만든 마을인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구성원들이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사는 ‘공동 소유’가 바탕에 깔려 있지요. 그런 생활이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분들이 많은데, 전 흙을 만지며 사는 사람들의 심성이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산안 마을을 비롯해 현재 전 세계 50여 개 나라에서 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마을이 있어요. 만약 제가 흙살림에 계속 머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화성 산안마을에 있을 겁니다. “농업은 종합예술이다”라는 글귀를 20여 년 전 그곳에 처음 갔을 때 보게 됐는데요. 그때부터 농업이라는 게 예술과 만나야 희망이 있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는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대만 정부의 초청으로 대만에 갔을 때가 기억나네요. 대학의 학과 가운데 흥미롭게도 농업예술학과가 있더라고요. 농업과 예술은 애초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봅니다. 농업은 노동이라고 보던 관점에서 한 발자국 나아간 셈이지요.
천호균 | 농사짓는 일이 곧 예술 행위라고 여기면 논밭에 나가는 일이 조금은 덜 고될 듯 한데요. 5년 전 헤이리에 이사 오면서부터 텃밭에 이런저런 작물을 키워보고 있는데 농사만큼 힘든 일이 없어요. 체력 소모가 만만치 않은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진도가 나가지를 않습니다. 날씨에 따라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고, 작물마다 성격도 다르고 조금 알 듯 하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려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요. 농사는 정말 아무나 짓는 게 아니구나 하면서 낙심했는데, 그 순간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 혼자가 아니라 햇빛, 물, 바람 등 자연의 모든 주체들이 힘을 모아야 하는 공동 작업이라는 걸 잊고 있던 거죠. 그런 점에서 농사는 예술, 종합 예술이 맞습니다.
이건 조금 다른 각도에서의 이야기인데요. 농업이 기존의 예술적 상상력과 결합하는 방법도 농업과 예술이 하나 되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렌디한 상품을 광고할 때 배경으로 삼은 곳들이 주로 폐허가 된 공장 같은 곳이었는데요. 패션쇼 무대도 중국의 낡은 화학 공장이나 유럽의 고전 미술관 등이었고요. 하지만 앞으로는 감각적으로 앞서나가는 사람들이 농촌에 주목할 겁니다. 지난 봄 샤넬이라는 브랜드는 패션쇼 무대를 헛간으로 꾸며 전원적인 느낌을 선보였는데, 그런 시도들은 더욱 많아지리라 예상해요.
반대로 농산물을 판매하는 매장은 예술적인 갤러리처럼 꾸미면 좋겠지요. 단, 작품을 멀리서 감상해야 하는 기존 갤러리와는 달리 마음껏 작품을 만질 수 있고, 맛 볼 수 있고,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오감이 열린 공간으로 말입니다. 공간 자체가 흙의 연장선상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예술 현장이 되는 셈이지요.
이태근 | 말씀을 듣다보니 시장에 꽃향기만 나는 게 아닌데 과연 장 보러 온 도시 사람들이 된장 냄새 나는 걸 좋아할까? 또 저처럼 예술에 일자무식인 사람들은 갤러리처럼 만들어놓은 매장에서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데 어떻게 보세요? 장삿속으로 농산물에 예술이라는 포장을 씌우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불러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천호균 | 듣고 보니 그럴 우려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농업과 예술의 결합에 대한 이해가 점차 확산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의도만 진실하다면 말입니다. 이 회장님께서 더 잘 보셨겠지만 사과나무가 열매 한 알을 맺으려고 벼가 알곡을 맺으려고 몇 개월 동안 온 힘을 쏟잖아요. 그걸 보면서 전 작품 하나를 위해 작가가 긴 시간 공을 들이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뿌리에서 물을 빨아들여 가지와 잎을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사과나무나 벼나 모든 식물들의 하루하루는 창조의 나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매 한 알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품이고요. 그 과정에 담긴 예술적 가치를 저는 목격자 입장에서 전달할 책임을 절감합니다. 과정상의 오해도 생길 수 있고 장삿속으로 뛰어드는 이들도 있겠지만 멀리 내다봐야지요.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을 가지고요.
예술 마을 헤이리에 ‘농부로부터’ 매장을 내면서 저 나름대로 가슴에 품은 다짐 같은 게 있습니다. 가게를 통해 기존의 예술 영역을 뛰어넘는 ‘생활의 예술’ 영역을 개척해보자는 것이었는데요. 헤이리에 올 때 사람들이 으레 기대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일상에서 벗어나 그림 감상하고, 커피 한 잔 하며 여유를 되찾고…… 그런데 그런 기대를 넘어서 우리가 평소 잊고 있던 삶의 소중한 가치를 떠올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농부로부터’ 매장의 바닥을 보면 실개천이 그려져 있는데요. 고객들이 우연히 바닥을 보고 “어, 이거 개천 아냐?” 하면서 온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샘솟기를 바라고 그려놨어요. 졸졸졸 개천에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기억하는 이에겐 물소리가 들릴 테고, 시골 원두막에서 옹기종기 앉아 참외 한 알 깎아 먹던 추억을 갖고 있다면 잠시나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무감각해졌던 예술적 감성들을 되살리면서 거칠어진 사람들 심성도 부드러워질 수 있겠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유기농 농산물을 파는 매장의 분위기를 형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여러 가지를 구상 중인데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계시면 좀 풀어놔주십시오. (웃음)
이태근 | 저야 술 마시는 건 좋아하지만 예술은……(웃음) 게다가 말씀 들어보니 저보다 더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계신데요. 도리어 제가 배워 가야겠습니다.
천호균 | 하하, 이거 한방 먹는 것 같습니다. 농사짓기 전부터 제가 중요하게 여겨온 것이 예술적 감성인데요. 쌈지 디자이너들에게도 항상 ‘편하게!’ ‘자연스럽게!’ ‘자유롭게!’를 강조해왔으니까요. 그 감성을 ‘농부로부터’에서도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매장에 ‘생긴 대로’ 코너를 만들고 생김새가 매끈하지 않거나 흠집 있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처음에는 못난이 코너라고 불렀는데, 못났다 잘났다 하는 것도 인간 중심으로만 판단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 ‘생긴 대로’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생긴 대로 삽시다.” 그런 의미인데 자연스러움을 중심에 둔 발상이지요.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애써 채소와 과일을 키운 농부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멀쩡한 농산물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은 가격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으니 양쪽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고요.
이태근 | 소비자 입장에선 반길 일이었겠지만 농부들은 무척 난감해했습니다. 프로 농사꾼인 내가 어떻게 비틀리고 못생긴 걸 내놓냐면서 못난이 팔았다고 소문나면 큰일 난다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그것도 농부의 눈이 아니라 소비자의 시선으로 본 결과죠. ‘생긴 대로’라는 농산물을 보면서 저는 소비자들이 잘 생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동시에 생각해봤으면 하는데요. 반듯반듯하게 생긴 것을 진정으로 잘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것이 농약 치고 흙속의 미생물은 모조리 죽인 다음에 공장에서 규격에 맞춰 찍어내듯이 길러낸 결과물이라면 뭐라고 말할까요? 정작 있어야 영양분은 사라진 채 겉만 멀쩡한 경우도 적지 않은데 말입니다. 생김새에 대한 판단의 기준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어요.
천호균 | 바로 그겁니다. 못생겼다 잘생겼다 할 때 이 ‘생기다’는 살아 있다는 뜻의 ‘생(生)자를 쓰니까 말 그래도 ‘살아 있다’는 말인데 우리는 살아 있는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습니다. 저희 집 벽 한가운데에 “생긴 대로 살자”라는 가훈 같은 글귀를 걸어놨는데, 보면 볼수록 그 말은 저를 늘 깨어 있게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생긴 대로 잘만 살아가는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아요. 남들이 세워놓은 기준으로 판단하니까 그 안에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본래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이 흐려진 게 아닌가 싶어요. 얼마 전에 친구들과 밥을 먹는데 TV에 한 여자 운동선수가 나왔어요. 이름은 안 밝히는 게 나을 테니 생략하고. (웃음) 제가 저 친구 참 예쁘지 않냐고 했더니 제 친구들이 절 보고 “넌 어쩌면 그렇게 눈이 낮냐.”며 놀리는 거예요. 심하게는 변태라고 하기도 하고. (웃음) 제 눈에는 밝고 건강한 에너지가 가득해 참 예쁘게 보이는데, 왜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해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각자 ‘생긴 대로’의 가치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잃어버린 듯합니다.
이태근 | 동감입니다. 말씀 나누면서 보니까 천 사장님과 제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역시 생긴 대로 사는 게 아닌가 싶네요. 사실 생긴 걸로 보면 제가 조금 더 잘생긴 것 같기는 한데.(웃음)
천호균 | 그건 좀 더 깊은 토론이 필요한 문제 같은데요. (웃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생긴 대로’를 통해 제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농산물만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시각, 아이들을 보는 부모님들의 시각도 달라졌으면 하는데요. 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을 생긴 대로 살게 놔두지 않습니다. 어른들 생각대로 틀을 만들고 거기에 자녀들을 맞추려 하죠. 원래 교육이란 것은, 자기만이 가진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생기를 북돋워주는 일이 아닌가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각자 가진 생긴 대로의 틀을 짓밟고 파괴해버립니다. 아예 해체까지 해버려서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지요. 귀농을 하려는 분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아이들 교육문제라고 하는데, 저마다 고민의 지점은 다르겠지만 궁극적인 핵심은 “어떻게 하면 일류대학 가게 할 수 있을까?”에 있는 듯 보여요.
유기농에 깃든 정신을 교육에 연관시켜 본다면 전 농부가 흙을 믿고 정직하게 농사짓듯이 자녀의 바탕이 어떤가를 살피고 믿는 게 부모 된 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서 한 마디 들을 각오로 얘기하는데, 사실 우리 집의 두 아이들은 그야말로 방목 교육, 알아서 잘 커라 하면서 키웠어요. 집사람은 그걸 자랑이라고 떠들고 다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웃음)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스스로 찾아서 앞가림 할 수 있도록 하고,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도록 하는 게 최선이자 최고의 부모라고 믿었거든요.
이태근 | 부모로서의 근무 태만을 이렇게 돌려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웃음)
천호균 | 어어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말씀을 더 드려야겠습니다. 방목 교육은 결코 방치 교육과 다릅니다. 방목은 생명을 기르는 하나의 방식이고, 그러자면 우선 어디에 좋은 풀이 자라는지를 가려서 방목해야 하겠지요. 독초가 있는 곳에서 키우는 것을 방목 교육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늑대가 오고 있는데도 아무런 방어책을 세우지 않는 것 역시 방목 교육이 될 수 없고요. 아이의 자유와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가능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부모나 농부는 여러 공통점이 있는듯해요. 지금까지의 농사 경험에 비추어보면 무엇보다 잘 기다릴 줄 알아야하고요. 농약과 비료를 주면서 제발 좀 빨리 열매 맺으라고 독촉하듯이, 비싼 학원비 내주니까 빨리 성적 올려라, 이건 비싼 음식이니까 나눠먹지 말고 너만 다 먹으라고 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이태근 | 농사를 짓다보면 왜 자식 농사라는 말이 나왔는지를 알게 되죠.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나 야속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일수록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믿어주는 게 아니라 믿는 거예요. 남들보다 더디게 클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을 수도 있지만 끝내 튼튼하게 잘 자랄 거라는 믿음이요.
가지치기를 하잖아요. 이때 신기한 것이 가지를 지나치게 쳐낸다 싶으면 나무는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지를 냅니다. 마치 강압적으로 가르치려고만 드는 부모들에게 반항하면서 아이들이 곁길로 새듯이 말이지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농사나 자식 농사나 기다림의 미덕을 십분 발휘해야 합니다.
천호균 | 백배천배 동감입니다. 이제 보니 우리 대화가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가고 있네요. 제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앞서 했던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웃음)
유기농 농산물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한 뒤 고민했던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릴까 하는데요. 그동안 쌈지를 통해 전 소비자들과 편하고 자유로운 느낌으로 소통하는 쪽이었는데, 기존의 유기농 농산물들이 지나치게 심각하고 계몽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단순한 소비를 넘어서 새로운 문화를 싹틔워보자는 것까지는 좋은데 뭔가 경직된 분위기라는 느낌이 들어서 불편했습니다. 유기농이 좀 더 가볍고, 일상적이고, 친근한 주제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태근 | 책임을 통감합니다. 유기농을 하는 분들이 책임감은 투철한데 융통성이 좀 부족합니다. 유기농은 환경, 생태적 가치와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책임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게 된 부분도 있을 겁니다. 유기농이 담고 있는 생명력 있는 에너지를 활기 있게 전할 수 있어야겠지요
천호균 | 유통이란 게 서로 통하도록 하는 것이니 만큼 농부와 소비자들, 그리고 흙과 사람이 잘 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봐야지요. 그러다보면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길이 열리겠고요.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말을 뒷받침할 좋은 문구를 찾던 중 현대 문명을 두고 깊이 성찰했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예술에 대해 한 말을 접하게 됐는데요.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예술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남겨둔 작은 야생의 섬처럼 현대 문명 속에 살아 있다”. 전 여기에 예술 대신 ‘농사’라는 단어를 대체해서 쓰고 싶어요. 농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남겨둔 작은 야생의 섬처럼 현대 문명 속에 살아 있다. 정말이지 말이되지 않습니까?
이태근 | 그렇습니다. 진정한 농사, 흙을 살리는 농사는 인류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줍니다. 흔히 하는 말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잖아요. 본성은 아무리 해도 바뀔 수 없다는 것인데 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선한 본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문명이 그 본성을 덮어둔다 할지라도 인간이 그 성질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테고, 흙을 살리는 농사를 지으면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는 그 본성이 살아나리라고 봐요. 유기농업은 우리의 도시 문명, 기계 문명이 갉아먹어버린 인간의 심성을 재생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문명이라고 이름 붙은 것들이 사람 마음을 얼마나 거칠게 만들었는지 도시에 오면 피부로 느끼게 되는데요. 특히 도로에서 지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경적을 울려대는 모습을 보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참, 자동차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는데, 한숨 돌릴 겸 들어보세요. 제가 사는 곳 충청도 얘기입니다. 서울 사람이 한적한 일차선 도로를 가는데 앞차가 속도를 내지 않았다고 해요. 급한 서울 사람은 경적을 울리면서 재촉했는데, 앞에 가던 차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운전자가 내려서 뒷 차로 오더랍니다. 서울사람은 큰일 났다고 하면서 잔뜩 겁먹고 있는데 앞사람이 그러더래요. 충청도 사투리로 점잖게 “그렇게 급허면 어제 오지 그랬슈.” (웃음) 천호균 | 웃자고 들려주셨지만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닌데요. 현실을 가장 예리하게 바라보고 민감하게 느끼는 분들이 시인이라고 하는데, 최근 시인들이 한 목소리로 속도에 대한 경고음을 내고 있단 말입니다. 빠르고 느린 것은 저마다 상대적일 텐데요. 문제는 그 속도가 자기 삶의 리듬에 맞춘, 스스로 조절 가능한 속도인가에 있겠지요. 떠밀려가는 방식으로 조급하게 달리고 있다면 한번쯤 멈춰서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빨리 가야 할 급박한 일이 있는지, 가속이 습관이 되지 않았는지,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조급하게 만들었는지 찬찬히 따져봐야 하는 것이죠.
* 천호균&이태근, ‘살림하는 두 남자’의 대담은 10월중 책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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