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는 1962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땅에 구멍을 내는 데에는, 핵폭발물이 제격이죠. 큰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요.” 이른바 “핵공학”에 대한 텔러의 남다른 관심은, 원자 무기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간 플라우셰어 프로젝트(Project Plowshare)로 이어졌다. 1957년부터 1975년까지 텔러와 그의 동료들은 광업, 석유 및 가스 탐사, 심지어는 토목사업을 위한 편리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핵무기를 활용하는 계획에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사용했다. 폭탄은 어쩌면 알래스카에 새로운 항구를 만들거나 파나마 운하를 하나 더 파는 데 사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플라우셰어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런 노력이 인류와 환경에 과도한 위험을 가져오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플라우셰어 지지자들은 핵 건설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핵심 산업기반시설 부문에서 정부 예산을 절약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처음 제안된 지 5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면, 플라우셰어 프로젝트는 냉전시기 과학기술에서 잘못된 모든 것의 상징처럼 보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군사 연구의 결과가 자연스럽게 민간 영역에 응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기반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보고서는 기밀로 취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원자물리학에 열광했고 핵무기에 깊이 빠져 있던 강력한 정치적・과학적 후원자들의 지원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와 가정을 비판했던 대학의 과학자들은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돌이켜보면 플라우셰어 프로젝트의 기술적 오만은 그냥 우스꽝스러운 정도가 아니다. 냉전시기 다른 기술 프로젝트들이 다 그랬듯이, 환경을 심하게 파괴해놓았다.
그러나 플라우셰어 프로젝트의 이야기는, 냉전 자체의 역사가 그렇듯, 흑백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넓은 스펙트럼에 걸친 것으로 쓰여야 한다. 첨단기술을 사용하려 했던 당시의 접근법은, 과학, 그중에서 특히 원자과학이 산업기반시설이나 외교정책 등 국가의 중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시대에는, 그럴 듯해 보였다. 또한 플라우셰어 프로젝트의 모든 연구가 군사적인 목적을 띤 것은 아니었다. 플라우셰어 프로젝트는 방사선이 생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재정적으로 후원해서 시스템 생태학 분야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피할 수 없는 일도 모두가 동의하는 일도 아니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과학자, 언론인, 환경운동가, 정치인, 원주민 부족들이 끊임없이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실로 플라우셰어 프로젝트는 냉전 과학의 시대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플라우셰어는 고삐 풀린 기술관료제의 한 가지 사례라기보다는,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인들이 국가가 지원하는 과학에 대해 가졌던 믿음과 이러한 겉으로 보이는 합의 바로 아래로 스며 나왔던 불신을 동시에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책은 냉전시기 과학기술의 이야기를 미국을 중심으로 풀어보려는 시도이다. 이 책에서 나는 “냉전”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되기까지 미국과 소련 그리고 각각의 연합세력들이 맹렬한 갈등을 빚었던 시기로 정의한다. 이 책은 폭넓은 설명보다는 입문을 위한 종합서를 지향하면서 주요 에피소드, 일화, 인물을 이용하여 과학기술이 냉전 국가에서 차지했던 핵심적이고 독특한 지위를 보여준다.
이 책의 몇 가지 주요 주제는 미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다른 주제들은 과학사에 좀 더 특화된 것이다. 좀 더 넓혀 보자면, 냉전시기 과학과 국가의 관계는 미국인의 삶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반영했다. 뉴딜이 시작된 이후 1970년대 초까지는 미국 역사상 정부가 가장 크게 확대된 시기였다. 미국적 삶의 주요한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과학 연구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따라서 연방정부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다. 정치 평론가들과 보수층 유권자들이 정부 주도의 프로그램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원 역시 시들해졌다. 소규모 개별 연구가 거대하고 위계적이며 다학문적인 실험실로 대체된 것은 미국 기업사의 익숙한 테마와 궤를 같이한다. 사회사에서 보면 과학자들이 보안 청문회(security hearings)와 충성 조사(loyalty investigation)에 시달린 것은 1950년대 미국 시민들이 당한 것과 똑같았다. 그중 몇몇 과학자들이 베트남전 반전운동에 참가한 것은 어느 정도는 196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과학사에 특화된 이 책의 다른 테마들은 전후 미국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여줄 것이다. 1950년대의 무시무시한 상징이었던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과학기술이 차지한 특별한 역할은 과학자들이 정치적 권위를 지닌 특별한 인물로 여겨지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시 정부에서부터 미 국방부에 이르기까지 관료들이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정책결정 과정에 결합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음에 따라, 기술관료 엘리트들이 정책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미국 국내와 국제 무대에서 계속 중요해졌다. 마찬가지로 1960년대 대외 정책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과학이 어떻게 많은 정책결정자들에게 민주주의를 대변하게 되었는지를 꼭 이해해야 한다.
물론 냉전은 과학의 실천 역시 바꾸어놓았다. 냉전 중 과학의 성격과 영향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점차 커져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1년 퇴임연설에서 이른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는 것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아이젠하워에게 군산복합체는 군사 연구, 개발,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부분의 활동이 외부 산업체 혹은 대학의 용역으로 진행되는 것을 의미했다. 전후 군사 연구개발이 첨단 과학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군산복합체의 성장은 정교하지만 조정이 덜 된 연방과학 자문구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후략) * 이 책은 10월 마지막째 주에 독자분들께 선보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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