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중에서>
“사람들과 알게 되면 저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도와줘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문제를 갖고 있지요. 자기 문제를 얘기할 때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드디어 문제가 해결되면 그 사람들은 더 이상 연락이 없답니다. 그러면 무척 실망스럽고, 넌 어쩔 수 없어, 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당신의 클라이언트 얘기를 하는 건가요 아니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얘기인가요?”
“그야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 대해서지요. 직무상 돌보는 가정에는 아예 감사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답니다.”
--사회복지사, 여성, 40세
“대학에 다닐 때 루카스는 심한 능률저하와 불안으로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를 보살피며 내내 돈을 벌어야 했지요. 그러다 그가 졸업시험을 마치자 제가 병이 들었어요. 우리는 이제 서로 헤어지기로 했답니다. 그는 제가 그동안 자기 숨통을 죄었다고, 자기는 의무감으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난 그저 그 사람을 돕고자 했을 뿐인데요...”
--교사, 여성, 29세
이 일화들은, 여기에서 그 형성과 내적 타당성을 다룰, 조력자증후군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의학에서 증후군이란 병적일 수 있는 개별 특성들의 독특한 조합을 의미한다. 심리학 분야에서 ‘건강’과 ‘병’의 경계를 구분하기란 대체로 쉽지 않다. 특히 타인을 돕는 행동, 즉 이타주의와 같이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행동에서 이 경계를 구분하기는 더욱 어렵다.
나는 인간의 훌륭한 특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그 가치를 훼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도우려는 의지에 '결국 이기적' 동기가 깔려 있음을 밝히려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다. 이타적, 이기적 행동의 구분은 그 자체가 특정한 사회적 발달 형태의 결과이다.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구분이 더욱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분명해진다. 우리는 조력자 성격에 대한 이상적 상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상적 상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종종 해를 끼친다. 이 글에서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육교사, 의사, 심리치료사, 성직자, 교사)의 다양한 어려움과 갈등을 언급함으로써 완벽한 조력자의 이상적 상을 발전시키려는 의도는 결코 없다. 효과적인 도움의 전제조건은 바로 자신과 타인의 약점과 결핍에 대한 공감적인 이해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
번역을 마치면서 왜 오래전부터 이 책을 꼭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는지 되짚어보자니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오전 중년여성 여러 명이 내가 타고 있던 지하철 칸에 들어서면서 일행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아침식사는 했는지, 가족들 식사준비는 해두고 나왔는지 등을 서로 물으며 그 시간에 집을 빠져나오느라고 얼마나 바빴는지를 저마다 유쾌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오고가는 말을 들으니 그들은 어느 종교단체에 소속된 사람들로서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해왔고 그날도 봉사하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몇 정거장이 지나서 그 일행이 왁자하게 내리는데 한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왔다. "봉사도 중독될 수 있어. 자칫하면 자기 집안은 엉망으로 버려놓고 엉뚱한 데 가서 돕는다고 나서게 된다니까." 그들이 내리고 난 갑자기 조용해진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문제와 대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남을 도와주는 일에 전념하는 ‘조력자증후군’을 이보다 더 단순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봉사활동의 동기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신이 남을 돕는 동기에 의문을 품고 그것과 거리를 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그 일이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힘든 교육과정을 거쳐 직업이 되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내가 『무력한 조력자』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도 바로 이 책이 개인의 삶과 집단의 공동생활에서 경직된 이상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며, ‘좋은 일’을 하는 조력자들의 직업선택 동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성취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모습과, 소명의식으로 드높아진 직업적 이상을 좇느라 전력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진다. 특히 조력직과 같은 ‘이타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그 교육과정에 있는 학생들은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적 조력자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일방적으로 그것에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조력활동이 적절히 가동되는 지원체계 없이 대부분 조력자의 자기희생에 기대어 이루어질 때 그 사회의 조력자상은 극히 이상화될 수뿐이 없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희생적 활동에 합당한 보상이 없어도 조력자는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이상화된 조력자 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해칠 지경이 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돕게 된다.
슈미트바우어는 이 책에서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남을 돕다가 급기야는 조력활동에 중독되는 조력자들의 독특한 정신구조를 ‘조력자증후군’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이 성격특성의 원인을 자기애적 장애로 보고 그것이 직업 활동과 사생활에서 어떻게 표출되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어린 시절 자기애적 만족이 거절당하면, 부모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즉, 초자아와의 경직된 동일시가 아이에게는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그 아이는 성장하여 자신이 그토록 원하고 그리워했던 것을 자기 자신에게는 주지 못하고 ‘이타적’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경직된 초자아는 직업적 책임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직업 활동을 시작할 때는 이미 조력자증후군이 예비된 상태가 된다.
이 책은 출간과 더불어 독일사회에서 예상 밖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조력자들을 신경증적인 인물로 치부했다거나 조력활동을 자기애적 만족의 결핍을 보상하려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한 것으로 폄하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논쟁의 발화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출간된 이 책이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사회 환경과 조력자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력자들의 정신적인 문제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가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에서 조력자들의 성격특성을 일컬은 ‘조력자증후군’이라는 용어는 이제 원래의 맥락을 어느 정도 벗어나 남을 돕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신적 문제를 총칭하는 일상어가 되었다.
독일어권에서 조력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이 분야의 교육과정에 있는 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이 책을 번역하는 데는 예상보다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정신분석적 상담자로서의 전통적 직업이력과 거리를 두고 대안을 찾아 새로운 길을 열어온 저자에게 당연히 필요했을 듯싶은 많은 새로운 합성조어들이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지연시키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놀이를 망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금기시 되어온, ‘이타적’ 조력활동 뒷면을 섬세하게 파헤쳐 독자들로 하여금 나름의 해결점을 찾게 하는 과정에서 번역의 의의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정신분석에 대한 인식과 수용의 정도에 있어서 독일사회와 한국사회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자신이 왜 항상 주기만 하는 사람이 되는지, 어떤 이유로 돕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는지, 돕는 일이 왜 즐겁지 않은지 반문하고 숙고하는 데 자극제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독자들이 자신의 욕구를 체험하고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넓혀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자신이 그리워했던 것을 바로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위해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력한 조력자>는 11월 말에 독자 여러분에게 선보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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