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범죄의 재구성
30년간 은행원으로 살아 온 평범한 시민. 그저 평범한 모습으로 삶을 그려나가기 지루하여 역사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세상을 호흡하며 공부하려던 사람. 그에게 어느 날 걸려 온 옛 직장 후배의 전화 한 통으로 이 사건은 시작된다.
“선배님, 요즘 힘드시죠? 좀 어떠세요”
“아니, 이 사람아 무슨 말이야. 내가 뭐 늘 그렇지. 자네는 별 일 없지?”
“아...선배님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다 알고 있어요. 다 들었단 말이에요.”
“아니 이 사람, 뚱딴지처럼 계속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일이 있다고?”
“아니, 선배님. 진짜 모르세요? 총리실 일 말이에요.”
“응? 무슨 소리야, 총리실이 뭐라고?”
그는 정말 영문을 몰랐다. 무슨 일이 있는지, 왜 후배는 처연한 목소리로 그를 동정하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는 부분도 없었다. 대체 총리실이라니. 국무총리란 대통령 바로 다음 사람. 1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던 재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 아니던가. 그 총리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무슨 일로 후배에게 이야기를 한 것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는 후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무사로 일하는 후배는 고려대에서 노동관계 대학원을 다니다 노동부 소속 공무원 원충연을 만났다. 그런데 어느 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간만에 만나 식사나 하자고. 본래 특수대학원이라는 곳은 어떤 이유로든 인맥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것도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 못 만날 이유가 없었다. 하물며 동기들의 소문에 따르면 원충연은 이제 노동부 소속의 평범한 일개 사무관이 아니었다. 뭔가 대단히 위세를 떨치는 것 같다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전언이었기에.
정해진 순서처럼 식사를 하며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원충연은 충격적인 내용을 발설한다. “당신 내 말 잘 듣고 공 한번 세워 볼텐가?". 앗 이게 무슨 말인가. 귀를 쫑긋 세운 그에게 원충연은 서슴없이 말을 이어간다. “청와대가 국민은행장을 곱지 않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가서 전하시게. 자리 보전하려거든 내 말대로 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국민은행 자회사로 설립되었던 KB한마음이란 회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 대표인 김종익이라는 자가 영 불순하더군. 빨리 그를 자르고 모든 것을 빼앗아야 그나마 행장이 연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 고급 정보이니 어디 가서 내가 한 말이라 하지 말고 행장에게 직보해서 공을 한 번 세우란 말이네. 나처럼 중요한 일을 맡은 공직자 하나 알고 있으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생긴다는 것도 명심하고.”
그때 그의 머리 속은 너무도 복잡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며 웬 말이란 말인가. 행장에게 직보하라니. 김종익 사장을 쫓아내라니. 도무지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총리실에 파견된 노동부 소속 공무원이 어떻게 김종익 사장을 알았을까. 아니, 그가 불순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평소 책 많이 읽고 생각 깊은 분이란 건 알고 있지만 누구한테 실수하거나 피해를 입힐 사람은 아닌데.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김종익 사장이 뭘 잘못했다는 건가요? 힌트라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응, 그 사람이 블로그를 갖고 있어요. 근데 거기에 각하를 비방하는 동영상을 올렸더라고. 국가원수를 모독하는 내용을 아무나 볼 수 있는 자기 블로그에 올린 사람이 국민은행 계열사 사장으로 있으면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런 사람을 두고 행장이 자리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게 만용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김종익 사장과 자신이 친하다면 친한 사이지만, 그가 무슨 블로그를 갖고 있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무슨 능력이 있어 대통령을 비방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올렸다는 것인지 당췌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자신에게 소중한 정보를 주어 감사하다며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고 원충연과의 자리를 파한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선배 김종익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권력의 촉수를 강하게 느낀 그의 육감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후배에게서 황당한 소식을 접한 김종익 씨는 순간 멍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아니, 내 블로그를 누가... 그러고 보니 평소 관심이 있던 의료민영화 등에 관한 내용이 담긴 동영상 하나를 몇 달 전에 보려다 시간이 없어 일단 블로그에 갈무리해 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문제라면 지워버리면 될 일이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일부러 퍼뜨리려 그런 것도 아닌데. 설마 요즘같은 세상에 그걸 갖고 뭘 더 문제삼을 수 있단 말인가. 은행원들이야 늘 성실하고 꼼꼼한게 지나쳐 소심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니 후배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닐터. 얼른 내리고 안심하라 전해주면 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거취와 행장의 안위를 연결지어 이야기했다는게 맘에 걸렸던 것이다. 다음 날 후배를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면 오해가 풀릴 거라 생각했다. 어쨌든 1,000명 이상이 근무하는 회사의 대표이사인 자신의 위치를 감안하여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다짐을 되뇌이면서.
후배를 만나 다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언지 확실히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블로그에 올린 동영상이야 이미 내린 후이니 그 사실도 알려달라고 했다. 후배는, 조바심치는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가 보는데서 원충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잔말 말고 어서 빨리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니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도 했다. 전화를 내려놓은 후배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아냐, 자네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은 아니지. 그렇지만 대체 앞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 물어보자. 다른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 같은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행동할까. 아니, 이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까. 혹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면 일이 좀 쉽게 풀리지 않을까. 빨리 움직여야 했다.
알고 있는 법조인과 정치인들의 연락처를 최대한 수소문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공포가 그를 힘들게 했다. 시민단체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유명 변호사를 만났다. 사정을 설명하려 하자 바쁘니 가능한 짧게 이야기해달라 한다. 총리실에서 나를 주목하고 있다 한다. 회사를 내놓으라 한다고 숨가쁘게 설명하니, “요즘 어디 그런 일이 한 두 가지여야 말이죠. 법적으론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 같네요. 저도 정보기관에서 사찰 당한지가 오래라서...”라는 무기력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중진 국회의원을 찾아 갔다. 어렵게 어렵게 사정해서 만난 자리. 그는 자신의 고교 동창이 총리실의 사무차장이므로 알아보고 조치할 수 있을 거라 했다.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사무차장도 잘 모르는 조직이며 어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특별히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다고. 절망이었다. 세상에 국무총리실장 바로 아래에 있는 사무차장이 모르고, 안다 해도 어쩌지 못하는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면 도무지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인가.
형제 이상으로 의지하던 역사문제연구소 사람들과 상의했다. 유력 매체에 기명칼럼을 갖고 있는 세칭 ‘진보적’이라는 학자들에게 부탁해 보았다. 어떻게 여론에 호소해 볼 수 없겠느냐고.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요즘 같은 시절에 국가권력에 무모하게 대들 생각은 없다고. 다시 힘이 빠졌다. 그간 내가 쌓아 온 정이 고작 이 정도이고 내 주변의 사람이 이렇게 없었단 말인가... 그때 절친한 후배가 겨우 입을 떼었다. 잠시 피신하는 게 어떻겠냐고. 촛불집회 이후 정권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이니 여기 있다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겠다며. 일본에 있는 서승 선생께 연락해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이다.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고립무원에 처한 상황, 뭐라도 잡아야 했다.
-<이젠 더 지킬 것이 없는 사람들>(최강욱) 편에서
*『옹호자들』은 4월 중순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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