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읽는 책 한쪽┃<번역과 중국의 근대> 쩌우전환 지음 / 한성구 옮김


옮긴이의 말

중국 문화가 학술, 사상, 사회 영역에서 외래문화에 의해 질적인 변화를 맞게 된 계기를 꼽아본다면 인도 불교의 전래와 서학(西學)의 수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계기는 문헌의 번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격의(格義)’ 방식을 통한 불전(佛典)의 번역은 불교가 유교의 나라 중국을 ‘정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서학 서적의 번역은 중국 바깥에도 학술과 사상, 제도 등의 측면에서 중국을 능가하는 수많은 나라[萬國]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중국이 근대적 사회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근대 중국인들은 유학(留學)이나 시찰, 선교사들의 활동 등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서학 서적의 번역만큼 그 영향력이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것은 없었다. 서학 번역은 규모와 깊이, 방식의 측면에서 이전의 번역이나 다른 활동을 능가했기 때문에 ‘번역이 중국의 근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서학 자체가 가진 파괴력에 더해 원저를 중국 상황에 맞도록 편역하고 번안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인해 근대 시기 번역 작품의 파급력은 원저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량치차오는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서양 서적 번역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國家欲自强, 以多譯西書爲本).” 《역서휘편(譯書彙編)》, 『태서저술고(泰西著述考)』, 『서학서목표(西學書目表)』, 『독서학서록(讀西學書錄)』, 『역서경안록(譯書經眼錄)』, 『망산여일기(忘山廬日記)』 등 번역 관련 잡지나 목록, 찰기와 일기 등이 중국 근대 시기에 대량으로 출현한 것만 봐도 당시 지식인들이 서학 번역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참패를 경험한 지식인들이 새로운 가치관과 지식체계, 신세계를 갈구하는 과정에서 이를 실현할 방법으로 서학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구망(救亡)과 계몽을 위해서는 서학을 알아야 하고, 서학을 알기 위해서는 번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번역과 중국의 근대』는 중국 명대 중엽부터 현대까지 약 40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비교적 큰 영향력을 미친 100권의 번역서를 선별하여 원본과 번역서, 번역 과정, 번역자, 사회적 영향력 등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하였다. 100권 중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저작인 『성경』, 『기하원본』, 『사회계약론』, 『신기관』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리어왕』, 『로빈슨 크루소』, 『레미제라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파우스트』 등이 포함되어 있어 거의 모든 분야의 저작이 망라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의 저자 쩌우전환(鄒振環) 교수는 현재 푸단대학(復旦大學)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명청 시기 문헌사 및 번역문화 연구에 매진해왔다. 이 책은 저자가 석사학위 논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노트 필기[札記]를 모아 펴낸 것으로, 책의 초판은 1996년 1월에 중국대외번역출판공사(中國對外翻譯出版公司)에서 발행되었으며, 2008년에 강소교육출판사(江蘇敎育出版社)에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저자는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충실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중국 근대 서학번역 문화사를 완성하였다. 책이 출간되자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현재까지도 저자가 쓴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다.

옮긴이는 90년대 후반 서양 과학 지식의 전래로 인한 중국 철학의 근대적 전환을 연구하면서 쩌우전환 교수의 책을 처음 접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지리학의 창으로 보는 중국의 근대: 1815~1911년 중국으로 전파된 서양지리번역서』를 비롯하여 『명말 한문 서학 경전: 편역, 해석, 전파와 영향』, 『서양 선교사와 청말 서양 역사학의 전래—1815년부터 1900년까지 번역된 서양 역사 저작의 전파와 영향』 등의 책은 서학의 전래와 중국 전통 지식계의 반응 및 태도 변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번역과 중국의 근대』는 서양 과학 서적의 번역 상황과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소개하고 있어 학위논문을 쓰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일찌감치 번역을 시작했지만,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내용으로 인해 번역 작업은 답답하게 진행되었다. 책에 등장하는 서양 원서와 중국어 번역서를 하나하나 대조하여 빠지거나 오기된 부분을 바로잡았고, 번역을 둘러싼 중국 근대 사회의 맥락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각주 작업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저자의 초판본과 개정판을 대조하여 수정되거나 추가된 부분을 모두 반영하였으며, 번역어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판본의 번역서나 평론서에 나오는 제목, 이름, 개념 등은 번역 당시의 한자도 함께 적어두었다.


책의 원제는 ‘影響中國近代社會的一百種譯作’으로 직역하면 ‘중국 근대사회에 영향을 미친 100종의 번역서’이다. 저자는 로버트 다운스의 『세상을 바꾼 16권의 책(Books that Changed the World)』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의 집필을 결심했다. 따라서 원제 또한 그 책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옮긴이의 생각에 원제목은 이 책이 가진 방대한 범위와 학술적 깊이, 그것을 만들어낸 저자의 노력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이 책을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권의 책’류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책들은 초심자들에게 넓은 상식을 제공해주긴 하지만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꼼꼼한 고증과 심도 있는 분석, 핵심을 짚는 저자의 평론을 담고 있어 수준 높은 학술서로서 손색이 없다. 따라서 책을 번역하며 한국어판 제목을 ‘번역과 중국의 근대’로 바꾸었다. 책에는 중국 근대 시기 번역과 사회 사이의 반영과 형성의 관계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