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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읽는 책 한쪽┃<번역전쟁> 이희재 지음


‘다원주의, 극우, 포퓰리즘, 민영화… ’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들은 오래전에 세상을 돈으로 움직여온 사람들에게 점령되고 왜곡되었다. 말을 바꾸면 현실이 달리 보인다!


서문

번역자로 일하면서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면 번역문에서 될수록 외국어의 흔적을 남기지 말자는 것이었다. 외국어가 거북해서도 아니었고 한국어가 자랑스러워서도 아니었다. 문턱이 낮은 번역을 하고 싶었다. 낯선 말은 글의 문턱을 높인다. 외래어는 컴퓨터, 치즈처럼 대체가능한 표현이 없을 때는 생산적이지만, 범죄분석가, 조리법, 표현, 운영 같은 말이 있는데 프로파일러, 레서피, 워딩, 거버넌스를 들이밀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좋은 글은 사람에게 다가가지만 나쁜 글은 사람을 짓누르고 몰아낸다. 예전에는 한문이, 지금은 영어가 쌓는 신분의 장벽이 자꾸 높아지는 고문턱사회의 담쌓기에 가세하고 싶지 않았다. 글의 진입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 populism을 포퓰리즘이 아니라 굳이 서민주의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프로파일러, 레서피, 워딩, 거버넌스는 profiler, recipe, wording, governance와 뜻둘레 곧 외연이 거의 같다. 하지만  populism과 포퓰리즘은 안 그렇다. populism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토지 소유 제한, 철도 국유화, 금융 민주화를 요구하며 미국에서 자작농이 중심이 되어 벌인 치개혁운동이었다. 자작농들은 Popular Party라는 정당까지 만들었다. 원래 Populism은 대문자 P로 시작되는 고유명사였고 Popular Party 정당이 추구하던 이념을 가리켰다. 하지만 1919년 이 당이 없어진 뒤로 populism은 소문자 p로 시작되는 보통명사로만 주로 쓰였다. 대문자 Populism은 한 정당의 강령을 가리키는 중립적 의미로 쓰였지만 소문자 populism은 유권자의 인기에 영합하는 무책임한 정책을 찍어누르는 낙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자 populism조차 아직도 학술서에서는 중립적으로 쓸 때가 적지 않기에 한국어에서 부정 일변도로 쓰이는 포퓰리즘만으로는 populism의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영한사전에는 대중영합주의, 인민주의 같은 풀이도 있지만 대중영합주의는 populism의 어두운 절반만 그린다는 점에서, 인민주의는 정작 미국의 자작농들이 거부감을 품었던 공산주의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적절한 풀이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populism의 뜻을 우리말로 제대로 담으려면 서민주의 같은 조어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래서였다. 말을 바꾸니 현실이 달리 보였다. populism을 서민주의로 바꾸니 포퓰리스트라는 장막 뒤에 가려졌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리비아의 카다피 같은 서민주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재력으로 언론을 장악한 소수가 오염시킨 포퓰리스트라는 말에 현혹당해 다수를 섬기려던 서민주의자들을 영문도 모른 채 비웃었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 돌이켜보니 중요한 말들을 놓고는 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수 기득권자는 privatization이 다수 서민을 고달프게 만드는 사유화임에도 민영화라고 고집했고 뒤에서는 테러집단을 양성하면서 앞에서는 테러집단과 싸운다고 우겼다. war on terror는 테러절멸전이 아니라 테러양산전이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아프리카 르완다와 콩고에서 벌어진 genocide 곧 집단학살의 주범은 이 지역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노린 서방 국가들과 결탁한 투치족 무장단이었음에도 서방 언론에서는 후투족을 가해자로 그렸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했고 가해자는 피해자로 변했다. 현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두고 열띤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이 ‘번역전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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