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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읽는 책 한쪽┃<붕괴의 다섯 단계> - 드미트리 오를로프 지음, 홍기빈 옮김


붕괴는 터놓고 말하기 불편한 주제이다. 진지한 사람들이 한담으로 혹은 술자리 안주거리 삼아 이를 토론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무언가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만 모인 자리가 아니면 이 주제로 이야기가 나오는 일이 거의 없으며, 아이들이라도 섞여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과학자, 공학자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금융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붕괴와 같은 이야기는 선뜻 꺼내기 힘든 대화 주제이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무시할 수도 없는 불편한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침묵이 강요되면서 방금 말한 전문가들은 갈수록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자신이 가진 데이터들에 기초하여 따져보면 볼수록 미래는 결국 붕괴라는 파국의 시나리오를 밟아나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업가, 정치가, 경제학자, 사회과학자, 심리학자, 교육자 같은 다른 전문가 집단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너무나 부정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붕괴이다. 하지만 붕괴가 정말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논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붕괴가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나는가, 일단 시작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다. 붕괴의 가능성을 완고하게 부인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정보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들 중에서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에서 그 지름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름길이라고 해서 더 쉽게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붕괴라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지적 능력이 아니라 심리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zabeth Kubler-Ross는 슬픔과 비극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부인, 분노, 협상, 우울, 받아들임의 다섯 단계로 정의하였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든가 이력 쌓기의 급작스런 중단 등 다양한 형태의 개인적 손실에 적용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여러 사상가들 특히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James Howard Kunstler와 존 마이클 그리어John Michael Greer는, 장래에 대사변을 피할 수 없고 자원 고갈, 파멸적 기후 변화, 정치적 무능력 등의 결합으로 여러 제도와 생명 유지 시스템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사실을 사회 전체가 (혹은 최소한 정보와 사유를 맡은 성원들이) 소화해가는 과정에도 퀴블러-로스의 모델이 무서우리만치 적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는 붕괴의 여러 유형에 대한 분류학을 도입하려는 노력 속에서 붕괴를 다섯 개의 단계로 정의하였고, 그 각각을 우리가 붕괴에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가늠해보고 또 그 준비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데 도움을 줄 이정표 또한 제시하였다. 나의 분류는 퀴블러-로스의 모델처럼 각각의 단계를 특정한 감정에 결부시키기보다는 현재 상태status quo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수준이 깨어지는 수준과 연결시켰다. 각각의 단계마다 환경에는 물질적인 관찰 가능한 변화들이 야기되며 그러한 변화가 설령 점진적으로 벌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의 정신은 아주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짜 바보가 아닌 한) 누구도 거짓말이라고 판명 난 것을 끝까지 믿는 바보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점은 어느 문화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바다. 1단계 | 금융 붕괴

“정상적 영리 활동business-as-usual”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이제 미래가 과거와 닮은꼴이라는 가정은 사라지며, 따라서 리스크의 평가나 금융 자산의 보증도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금융기관들은 지급불능 사태에 빠지며, 사람들의 저축은 깡그리 소멸하며 자본도 얻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2단계 | 상업 붕괴

“시장에 가면 다 있다the market shall provide”는 믿음이 사라진다. 화폐는 가치절하를 겪거나 희소한 상태가 되며, 각종 상품 사재기가 벌어지며, 수입에서 소매업까지 이어지는 연쇄 고리가 모두 끊어지며, 기초 생필품의 품귀 현상이 광범위한 일상적 상태가 된다.

3단계 | 정치 붕괴

“정부가 당신을 돌보아준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기초 생필품을 시장에서 살 수 없는 상태가 만연하면서 정부가 이를 해결하려고 여러 시도를 벌이지만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되며, 이에기성 정치권은 정당성과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4단계 | 사회 붕괴

“이웃들이 당신을 돌보아준다”는 믿음이 사라진다. 이 권력의 진공 상태를 자선 기관이나 그 밖의 여러 집단 등 지역의 사회 기관들이 메우게 되지만, 자원이 바닥나거나 내부 갈등으로 실패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5단계 | 문화 붕괴

인간의 선한 마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친절, 베품, 배려, 애정, 정직성, 환대, 연민, 나눔” 등의 능력과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가족은 해체되며 개개인으로 원자화된 사람들은 희소한 자원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이제 “내가 하루 더 살려면 네가 오늘 죽어야 한다”가 새로운 행동 원리가 된다.


방금 열거한 인간 미덕의 목록은 콜린 턴불Colin Turnbull의 『산 사람들The Mountain People』에서 가져왔으며, 나는 문화 붕괴에 대한 장 뒤에 나오는 이크Ik족에 대한 사례 연구에서 이를 좀 더 논의할 것이다. 또 위의 행동원리는 솔제니친의 『굴락 군도The Gulag Archipelago』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앞 단계에서의 실패가 누적되면서 빚어지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붕괴의 각 단계는 쉽게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되며, 심지어 중첩될 수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3단계에서 멈추었다. 여러 다른 민족들마다 마피아들이 창궐하였고 심지어 군벌로까지 발전하는 등의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정부가 이들을 이겨내고 권위를 회복하였다.


1단계나 2단계에서 사태를 멈추려는 노력은 필시 에너지 낭비일 뿐이며, 모두 함께 힘을 모아 차라리 3단계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4단계에서는 더 밀리면 죽는다는 결사항전의 태도로 방어해야 할 것이다. 5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한마디로 물리적 생존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서 (특히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그리고 위험한 핵물질 및 산업 시설이 있는 지역) 3단계의 붕괴도 반드시 회피해야 하는 곳이 있으니, 여기에서는 질서를 유지하고 재난을 피하기 위해 국제 평화 유지군이나 심지어 외국 정부와 군대라도 필요하다면 불러들여야 한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3단계에서도 무한정 번영을 누릴 수도 있으며, 인구 밀도가 성긴 지역에서는 4단계가 되어 환경이 극도로 파괴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무한정 생존할 수가 있다.


곧바로 5단계를 준비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일로 느껴질 것이다. 3단계와 4단계에서의 생존을 준비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으로 느껴질 것이며, 혹시 개인적으로 이를 계기로 출세를 도모할 계획이 있는 이라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3단계를 준비하는 것도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은 독자 여러분들이 알아서 생각할 문제로 남겨두겠다. 내가 희망하는 바는, 붕괴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인 단계들을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서구 문명의 붕괴” 따위의 모호할 뿐만 아니라 알고 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개념들에 휘둘리고 있는 현재의 붕괴 논의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유익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 이 책은 11월에 독자분들께 찾아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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