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녁이 ‘없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은, 손학규가 2012년 대선 캠페인으로 내건, 그리고 그가 출판한 책 제목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6년 ‘더 나은 삶의 질 지수Better Life Index’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저녁이 없다. 한국은 ‘일과 삶의 균형’ 항목에서 터키·멕시코 다음으로 나쁘다. 노동시간은 여전히 최하위이며 개인시간 또한 하위권이다. 사정이 더 나쁜 것은, 그렇게 일해도 서민들은 죽을 때까지 아파트 한 채 장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평균 매매가가 4억 정도이니, 집장만이 아니라 아파트 전세(수도권 평균 2억 5천, 전국 2억 3천) 값도 마련하기 어렵다. 세상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은 20대 총선 때 ‘칼퇴근법’을 공약했는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정치공약도 제대로 실현시키는 꼴을 본 적 없으니, 낙관은 금물이다. 칼퇴근을 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면야,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의 하나 그리할 수 있다 한들, 그것이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리라는 기대는 순진하다. <카카오톡이 무서운 노동자들> 포럼에서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발표한 “스마트기기 업무 활용의 노동법적 문제”에 따르면, 근로자 86.1퍼센트는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 등으로 업무를 봐야 한다. ‘속도의 철학자’라 불리는 프랑스 문화이론가 비릴리오Paul Virilio는 21세기를 맞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용된 사람들의 일하는 시간과 사적인 삶 간의 구분을 없앨 수 있도록 하는 휴대폰에 열정을 갖는 후기산업 회사들에게 우리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혹은 단순히 ‘파트타임’이 아니라 휴대폰을 제공해 지참하게 하는 ‘제로시간’ 계약을 도입하는 영국회사들에게 무어라 말할 텐가? 회사는 당신이 필요할 때 전화하고, 당신은 뛰어온다.” 150여 년 전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노동이 자본을 소모한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다. 자본이 (…) 삶을 소모한다.” 우리의 삶이 자본에 의해 소모된다는 것, 그러니까 자본의 구조에 맞물려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우리가 살 수 없는 세상이라니, 기막히고 무섭다.
어릴 때 곧잘 들었던 ‘시간은 돈’이라는 표현은, 이제 자명한 사실이 된 까닭에 듣기 힘들다. 오늘날의 ‘지구화된’ 생활환경에서는 속도와 이동성이 부富와 결합되어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속도도 이동성도 떨어진다.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다. ‘돈 많은 사람은 자가용을 타고, 돈은 없지만 시간이 있는 사람은 버스를 타고,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사람은 지하철을 탄다.’ 한동안 회자되었던 이 말은 그것의 한 양상을 나타낸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크게 부족하거나 없는 것은 우리가 특히 심하지만, 현대인의 삶의 보편적 양태다. 서구의 경우, 예컨대 에밀리포스트Emily Post의 보고에 따르면,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애도에 쓸 수 있도록 허락된 공식 기간이 1927년에는 3년이었다가 1950년에는 6개월로 줄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사별을 당한 사람들이 “장례식이 끝난 후 일주일 정도 이내에 일상적인 사회적 과정을 추구하거나 추구하려고” 애쓰도록 권고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사별을 위한 유급휴가를 오직 직계가족에 한정한다. 리프킨Jeremy Rifkin에 따르면, 미국 비즈니스는 “애도 의무나 애도 의식에 대한 공동체 참여를 점점 줄이도록 조장”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참여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수면 시간도 현격히 짧아졌다. 1930년대에는 미국인들이 평균 9.5시간을 잤으나, 1960년대에는 8시간, 그리고 지금은 겨우 6.5시간을 잔다. 1930년대에 비해 54퍼센트 줄어든 셈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생산수단이 몸밖에 없는 노예 신세인 피고용인들은, 인간적인 삶을 살 여건이 거의 마련되지 않는다. 대학들은 ‘비정년트랙’ 제도를 도입해, 9급 공무원보다 적은, 2천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연봉으로 교수를 고용해 쓰면서도, 대학평가 지표 향상을 위해 온갖 양태로 시간을 뺏는다. 오늘날은 정신노동자든 육체노동자든 (인간적인 삶을 위해 써야 할) 시간을 거의 모조리 돈벌이(생산)에 헌납하는데, 심지어 그 이외의 시간마저, 사랑이나 우정이나 보육이나 시민활동이나 개인적인 정신 함양이나 지적 혹은 감각적 자극이 아니라, 생산력을 회복해야 하는 시간, 곧 생산 준비시간으로 써야 한다. (후략) * 이종건의 생활+세계 짓기 시리즈 2권 <살아 있는 시간>은 10월 초에 여러분에게 선보일 예정입니다.
사진_ pixabay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