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읽는 책 한쪽┃ <식물에게 배우는 네 글자> 이 선 지음



4억 년과 200만 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숫자인지 가늠할 수 없으시겠지요. 이것은 식물이 육지로 올라와 자라기 시작한 햇수와 인류가 이 땅에 태어난 햇수입니다. 지구상에 육상 식물이 태어난 것은 약 4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 후 수억 년 동안 수많은 동물을 먹여 살렸으니 식물은 지구 생물의 어머니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보다 한참 뒤에서야 비로소 명함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인류보다 무려 수억 년을 더 살아온 식물은 우리의 까마득한 대선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억겁의 시간을 이 땅에 살아오면서 식물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겠습니까. 그런데 새까만 후배인 인간이 온 세상을 들쑤시고 휘저으며 이 땅의 제왕으로 군림하더니, 급기야 숲속에 잠들어 있던 바이러스를 깨워 호되게 역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부 우리가 초래한 일들이라 감내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동안 우리는 식물을 선배 대접은커녕 하찮게 여기거나 소홀히 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구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고 우리가 숨쉬기 어려울수록 식물의 의미와 가치는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산과 들로 쏘다니며 오랫동안 식물을 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떠오른 생각은 인간 세상과 식물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지요. 그것은 사람이나 식물이나 같은 생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식물은 사람과 닮았다. 식물은 피부를 지녔으니 그것이 껍질이다. 그 머리와 머리카락은 뿌리에 해당한다. 줄기는 형상과 특징을 지니며, 감각과 감성을 지닌다.” 르네상스 시대 스위스 출신의 의사이자 본초학자였던 파라셀수스가 한 말입니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도 식물의 뿌리가 뇌와 같은 기능을 한다는 ‘뿌리 뇌(root-brain)’ 가설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식물, 특히 나무는 형태적으로나 생리적으로 인간과 매우 닮아 오래전부터 동질감을 느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무와 친척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는 오토 링크의 표현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나무와는 형제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라고 했던 에리히 케스트너나 매화를 아내로 삼았던 임포(林逋), 그리고 매화와 호형호제하셨다는 퇴계 이황 선생을 생각하면 식물과의 교감이 얼마나 돈독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을 경외했지만, 거기에 압도당하지 않았고, 자연과 가까이 지냈으나 그것을 섣불리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연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았던 옛사람의 지혜로운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식물을 대하는 태도는 선조들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듯합니다. 식물을 너무 친근하게 생각해 함부로 대하거나, 아니면 그 의미와 가치를 과소평가한 탓이겠지요. 대선배인 식물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합니다. 구이경지(久而敬之)라는 말은 식물에도 유효합니다. 아무리 인간 세상과 식물 세상이 흡사하다 해도 ‘식물 국회’, ‘식물 정권’, ‘식물 정당’ 등의 표현은 달갑지 않습니다. 특히 ‘식물 국회’라는 표현은 식물을 모독하는 말이 아닐까요. 국민의 세금으로 허구한 날 정쟁을 일삼는 국회를 식물과 비교하다니요. 만약 식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식물이 무슨 죄가 있어 그 험한 국회에까지 끌려가 모욕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식물에 빚진 사람으로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국어사전에는 식물 국회와 식물 정당을 ‘제 기능을 못 하는 국회나 정당’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기능을 못 하는 식물은 없으니 이 표현 또한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른 생물에 빌붙어 사는 우리와 달리 식물은 독립적으로 살아갑니다. 평생을 한 곳에 뿌리박고 인의(仁義)를 실천하며 사는 생물이 바로 식물입니다. 이리저리 철새처럼 -동물학자에겐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정당을 옮겨 다니며, 개인 영달을 꿈꾸는 정치인보다 훨씬 나은 존재입니다. 제발 식물을 정치판에 끌어들이지 말기 부탁드립니다. 식물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제 말에 공감하시고 지지하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식물사회를 인간사회에 비유하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속담이나 사자성어는 옛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지혜와 통찰이 담긴 절묘한 표현으로 많은 부분이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자연현상을 빗대어 인간사를 비유해왔습니다.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찌 그리 우리의 삶과 닮았는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하며, 끝까지 살아남아 되돌아보는 삶’은 우리 인생사에서 매우 중요한 명제이자 과정입니다. 식물도 우리처럼 서로 사랑하고 갈등하며 생로병사를 겪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고 그 나무의 생장을 보면서 아이의 미래를 점쳤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아이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함께하는 운명의 나무였던 것이지요.



오래전부터 식물의 삶에 우리의 삶을 중첩 시켜보려고 궁리하던 차에 식물 세상을 사자성어로 풀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식물의 입이 되어 식물이 말하고 싶은 바를 전하는 것이 그동안 진 빚을 갚는 길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식물 세상도 사자성어로 해석할 수 있다면 옛사람들이 식물을 친척이나 형제로 칭했던 바가 생경하지만은 않겠지요. 사자성어 중에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거나 교활함을 경계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식물 세상에서는 그러한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 인간 세상보다 더 정직하고 공평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는 늘, ‘남을 보고 깨치거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이제는 ‘나무를 보고 깨치거라’로 들립니다. 이래저래 식물은 저에겐 고마운 존재입니다.



언젠가 오랜 벗이 “어렵고 딱딱한 논문이나 전공 서적도 좋겠지만 누구나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편한 글을 써보시라”고 충고하더군요. 그의 제안에 무모한 용기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생전 써보지 않았던 주제와 문체는 영 어색하였습니다. 마치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할 때처럼 괜히 긴장되고 온몸이 결린 느낌입니다. 글에도 쓸데없는 힘이 들어간 것을 아닐까 조심스럽습니다. 게다가 논문이나 전공 서적에서는 쓸 수 없는 경어체의 글도 오래간만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연히 그리되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경어체로 쓰다 보니 내 마음도 보드라워지고 온기가 도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더군요. 심지어 두 손이 앞으로 모이고 마음마저 공손해지는 느낌이랄까. 제 글에 제 마음이 움직였다면 참으로 낯간지러운 자찬이겠지만, 아무튼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펴낸 몇 권의 책들은 사실과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었으나, 이 책에서는 제 사유와 심상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처럼 말이지요. 지식을 공유하는 것보다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 훨씬 어려우면서도 의미 있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이 글이 식물에 기대어 자칫 남을 깨우치려 하는 꼰대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처럼 지루하고 따분한 것도 없으니까요. 글을 쓰면서도 내내 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수시로 자문하고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나의 반성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식물과 인간의 공통분모를 찾고자 노력했던 이 글을 통해 많은 분이 식물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호형호제하신다면 좋겠습니다. 각박한 세상일수록 온기가 필요합니다. 이 책이 식물에도 따스한 눈길 한 번 더 주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어설픈 원고를 반색하며 맞아주셨던 이갑수 대표님과 번듯한 책으로 엮어주신 변효현 선생님, 그리고 장황하고 따분한 글의 핵심을 뽑아 독특한 작품으로 재해석해주신 판화작가 김지형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유난히 힘들었던 지난 한 해를 잘 버텨준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코로나 19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비대면 화상 강의에 열심히 참여해준 모든 학생에게 고마움과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