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편지
세상을 홀로 떠돌아다닐 운명
그제 이스트리소르를 떠났습니다. 날씨가 참 좋았어요.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아 무려 열네 시간 가까이 물 위를 떠다녔는데도 항해한 거리 가 고작 26마일이더군요.
헬게로아에 상륙했을 때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절벽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감옥에 갇힌 기분이 들었던 탓에 약속의 땅을 밟기라도 한듯 환호가 터져 나왔지요. 이곳이 자유로운 땅으로 보여, 그런 대조 때문에 신선한 광채로 반짝거렸습니다. 여기서는 육로 여행도 가능 했어요. 육로 여행의 편안함을 전에는 몰랐습니다. 햇빛이 물 위에서 반짝거리던 모습에 피로해져 있던 제 두 눈은 이제야 드넓은 초록 들판을 보며 흡족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푸른 초원이 지금처럼 눈을 즐겁게 해준 적도 없을 거예요.
저는 퇸스베르로 돌아가야 해서 일찍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여전히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제 영혼은 이곳의 매력을 잘 알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우뚝 솟은 낭만적인 절벽들을 떠나온 우리는 천국 같은 풍경을 지나치며 퇸스베르까지 거의 쉴 새 없이 내리막을 달렸습니다.
바다와 산과 강과 숲은 끝도 없이 다채로운 경치를 선사했지요. 소작농들은 여전히 건초를 집으로 나르고 있더군요. 도로변 오두막들은 아주 안락해 보였어요. 평화와 풍족—물질적인 풍요가 아니에요—이 가득해 보였지만, 저는 지난번 묵었던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슬퍼졌습니다. 해 가 중천에 떠 있는 것이 싫었어요. 대낮이라니요.
퇸스베르는 고향집과도 같은 곳이지만 기뻐서 눈을 반짝거리며 들어가지는 못하겠더군요. 저는 제 방의 적막이 무서웠어요. 어서 밤이 와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거나 베개 위로 흘려보내고, 홀로 떠돌아다닐 운명을 진 세상에서 두 눈을 감고만 싶었습니다. 자연은 그토록 많은 매력—섬세한 감성을 불러내 소중하게 간직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서도 왜 결국에는 그런 감성을 품은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걸까요?
아마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미덕과 원칙에 근거해 행복을 계획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나요? 그런 것이 반문명화된 사회에서 어떤 불행의 입구를 열어놓던가요? 약한 마음 이 핑곗거리를 계속 찾아댈 때는 아무리 강직한 노력으로 만족을 구해도 상처 입은 가슴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자화자찬도 철저히 고독한 감정이라, 기대를 저버린 애정을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은 추방하고 고통은 차단하지 않는 우울을 세상 모든 것에 드리우지요. 저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그러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방안에 가만 있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녹초가 될 때까지, 그리하여 휴식을, 더 정확하게는 망각을 얻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답니다.
이날은 일 때문에 우울을 잊을 수 있었어요. 다음날은 스트롬스타드로 가는 길에 모스(Moss. 노르웨이 오슬로피오르 동쪽에 자리한 중요한 산업 도시이다)로 출발했습니다. 예테보리에 도착하면 패니를 안아줄 생각이에요. 이번에도 엄마를 못 알아본다면—그러면 마음이 아프겠죠. 얼마나 유치한 감정인지! 그렇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인 걸요. 일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맹목적 애정의 “빽빽이 밀려오는 공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답니다. 그러나 초원에서 송아지가 뛰어다니는 모습만 보아도 제 어린 장난꾸러기가 생각났어요. 일개 송아지라고, 여러분은 말하겠죠. 맞아요, 하지만 제가 가진 싱싱한 송아지랍니다(셰익스피어 『햄릿』 3막 2 장 101절에서 인용. 폴로니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을 맡아 브루투스에게 살해당하는 연기를 했다고 말하자 햄릿이 비웃듯이 한 재담이다. “그렇게 싱싱한 송아지를 살해하다니 아주 잔인했군.”)
글이 차분하게 써지질 않네요. 자꾸만 공상에 빠져들고 심장이 팔딱거리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바보 같죠! 쉬어야 할 시간인가 봅니다. 우정과 가정의 행복은 끊임없이 칭송 받는 덕목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세상에서 보기란 힘듭니다. 애정이 잠들지 않게 하려면, 우리 자 신의 마음속에서라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단순함과 허심탄회함은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는 약점에 가까워 보이지만 사랑이나 우정의 매력적 요소, 나아가 어린 시절의 온갖 황홀한 은총을 되살리는 본질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심미안에 영향을 미치는 대상들로 서로에게 애정을 품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저를 감동시키고 제 심상에 지워지지 않는 모습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점점 진부해지는 침체된 연민을 깨우려면 새로운 열정이 필요합니다. 심미안이 부족하여 끊임없이 동물적 감각에 의지해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면 좋게 말해 예의라고 하는, 꾸며낸 행동이 필요한 것처럼요. 동물적 감각은 상상력으로 지탱이 되지 않아 다른 정서들보다 쉬이 소진됩니다. 우정은 일반적으로 시작될 때 진지하며, 지탱해주는 무엇이 있으면 지속됩니다. 그 무엇이 보통은 새로움과 허영심이 적절히 섞여 있는 것인데, 지지물이 약하면 당연히 무너지겠지요.
한 희극 작품 속 멋쟁이는 자신이 아첨하려고 했던 대상에게 생각 이상의 과찬을 하게 됩니다. “저는 당신이 새로 알게 된 사람처럼 좋습니다”라고요(영국 왕정복고기의 기교 적 희극작가 윌리엄 워철리의 『시골아낙네』 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그런데 제가 왜 기러기를 쫓는 것마냥 우정에 대해 이런 부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저는 그저 이곳의 철새는 기러기들만이 아니라 까마귀도 있다고 알려주려 했을 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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