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나는 왜 서바이벌의 도상훈련에 나섰나?
“어떤 종류의 감옥살이를 다른 감옥살이로 표현해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무엇으로 표현해보는 것과 같다.” - 다니엘 디포
(…) 처음 내가 한 것은 나를 노리고 있는 온갖 파국의 시나리오들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전쟁과 테러, 지진과 쓰나미, 좀비와 전염병, 파산과 노숙, 쪽방과 골방… 멸망의 괴물들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나는 전략적으로 포기했다. 그래, 저들과 맞서 싸우지 말자. 그보다 먼저 상상 속에서 나를 저 밑바닥으로 떨어뜨려 보자. 내가 정말로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거기에서 과연 무엇을 만날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자. 진짜 절망은 그 이후로 남겨두자. 나는 부챗살처럼 넓게 퍼진 파국의 시나리오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 위기들이 내게 가져올 공통적인 상황을 ‘서바이벌 노트’로 정리하고, 멸망 그 다음 순간부터 내게 닥쳐올 문제들을 하나씩 체크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달려드는 괴물을 피해 안전한 공간에 몸을 숨기고, 고립된 공간에서 자급자족의 방도를 마련하고, 나아가 행복의 부스러기라도 얻어낼 가능성에 대해 탐구했다. 내 운명이 뻗어나갈 가능성은 다시 방사선처럼 다양한 시나리오로 흩어졌다. 나는 절망과 공포를 이기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몸뚱아리를 좀비에게 내줄 수도 있다. 수도자의 체념으로 인류라는 종이 사멸해가는 순간을 조용히 지켜볼 수도 있다. 혹은 유전자 깊숙한 곳의 야수를 끄집어내 숲 속의 짐승과 뒤엉키고, 먹거나 먹혀 자연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다른 생존자들과 만난다면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미래를 꿈꾸어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무리 속에서 생겨난 작은 반목 때문에 서로의 목에 칼을 꽂고 나란히 죽어갈 수도 있다. 어쩌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시 무리로부터 떨어져나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어두컴컴한 동굴을 찾아 홀로 남은 삶을 연명해야 되겠지. 나는 문득, 이 모든 상황들이 그저 게임인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서바이벌의 게임판에 던져졌고, 내가 마주치는 모든 타인은 이 게임의 경쟁자들이다. 나는 이제 저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내가 제거된다는 심플한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폭력, 거짓말, 따돌림, 때로는 따뜻한 휴머니티도 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이 게임은 자유경쟁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삶과 아주 닮아 있다. 다만 커다란 함정이 있다. 21세기의 인류인 나는 이 게임판에서 공정한 대결을 기대할 수 없다. 내가 게임을 하러 나타났을 때 모든 땅은 점령당해 있었고, 주사위의 운으로는 도저히 그 핸디캡을 극복할 수 없다. 내가 이 게임에서 제거당하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은 ‘무인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로빈슨의 섬일 수도 있고, 티벳 고원의 샹그리라일 수도 있고, 니어링 부부의 숲속 농장일 수도 있고, 은둔형 외톨이의 골방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거기에서 유토피아를, 다른 이는 거기에서 최악의 지옥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꿈, 아마도 악몽, 혹은 어떤 여행에서 돌아왔다. 가까스로 시간을 되돌려 파국 이전의 어느 때로 돌아왔다. 세상은 여전히 평온한 듯 보인다. 연인들은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나누고, 대학 신입생들은 들뜬 마음으로 교문에 들어서고, 우체통엔 결혼식 청첩장이 들어 있다. 나는 고양이 털이 묻어 있는 소파에 누워 달콤한 ‘일상의 감각’에 젖는다. 나는 지하 동굴에서 돌아온 앨리스처럼 크게 심호흡을 하며 가슴에 남아 있는 여진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냄새나는 하수구의 뚜껑을 열고 저 어두컴컴한 생존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것이 디폴트된 그라운드 제로의 어둠을 더듬으며 햇빛 한 줌을 찾아 헤맨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서두에서 말했듯이 나의 책상머리 연구는 진짜 서바이벌의 상황이 닥쳤을 때의 행동 매뉴얼은 될 수 없다. 좋게 봐준다면 ‘약간의 힌트’는 될 것이다. 여러 잡다한 지식들을 모아놓았으니 의외의 정보를 건질 수 있을지 모른다. 변기의 수조가 집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 남아 있는 장소일 수 있다든지, 사람 고기는 육포로 만들어 놓는 게 보관이 용이하다든지… 그러나 위기의 상황에서 이 책이 10쪽 짜리 응급처치 가이드보다 유용할 것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다만 이 책은 하나의 도상 훈련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생존 가이드 북이 단기간의 급박한 피신과 응급처치를 다루는 반면, 진정한 재생을 위해 장기간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지침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독자들에게 이 책 바깥에서도 이러한 생존의 도상 훈련을 계속해 나갈 것을 권한다. 나 자신은 생활의 순간순간에 서바이벌의 상황을 가정하고 파국을 예비하는 훈련을 시도한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게임이 될 수도 있다. (…)
우리는 파국을 상상함으로써 가장 기초적인 삶을 확인한다. 그를 통해 안락한 삶의 관성을 떨쳐내고, 우리가 살아가던 ‘매뉴얼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기회를 얻는다. 우리 삶에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단지 관념으로, 허영으로, 장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챙길 것은 무엇이고, 버릴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삶이라는 가방 안의 물건을 정리하며 허위를 내버리고 진짜를 채워넣는다. 부정할 수 없는 답은 허영만큼 불필요한 것도 없고, 건강과 지식과 철학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를 반대로 번역한 모습이다. 죽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삶을 역설로 체험하는 것이다. 서바이벌의 밑바닥에 뛰어내려 그 지옥을 만져보는 일은 곧 우리의 일상을 거울을 통해 비춰보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물어보곤 한다. 당신의 밑바닥은 어디인가요? 어디까지 떨어져도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의 상황이라면 거기에서 행복까지 얻어낼 수 있다고 여깁니까? 그것은 우리 일상의 순간순간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내 발밑에서 쌕쌕 숨쉬고 있는, 이 파국이라는 녀석을 조금 사랑하게도 된 것 같다.
* <어느 날 갑자기, 살아남아버렸다>는 12월중에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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