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읽는 책 한쪽┃지그문트 바우만이 전하는 <희망, 살아남은 자의 의무>


서문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악몽

어느 날 악몽을 꾼 적이 있습니다.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깼지요. 꿈속에서 저는 대학 교수였고, 뭔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꿈속의 상황은 제가 대학교수였던 시절, 학생들과 대면하면서 늘 겪던 일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었죠. 하지만 곤혹스러운 모순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품었던 이상적인 인간에 대한 그림이 저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었으니까요. 저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받으며, 창조적으로 사유하고, 죽은 학문의 가르침을 따르기 보다 올곧고 당당하게 서기를 늘 원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학생들이 제가 말해준 바대로 실천에 옮긴다면, 아마도 학위 취득 시험에서 낙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심사위원 중에는 분명 그들을 지나치게 독창적이고, 너무 창의적이라서 거의 비정상에 가깝다고 생각할 만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처한 모순적 상황이었습니다. 이상적인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고, 또 그러한 사람을 길러내고 싶지만, 이들이 실제로 살아가게 될 세계는 독창성, 대담함, 용기, 권위에의 도전 등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알고 계실 겁니다. 아직 역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인물이지요. 마르크스는 약 200년 쯤 전에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역사를 만들기는 하지만, 역사가 만들어지는 여건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경우를 비추어 보더라도, 마르크스는 옳았습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게 될 세계를 우리는 선택하지 않았으니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루길 원하는 것과 실제로 이룰 수 있는 것 사이의 충돌은 빈번히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이러한 상황을 울리히 벡은 “체계적인 모순을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라고 간단명료하게 묘사합니다. 말은 간단하겠지만, 이것은 매우 심각하고 어려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의 핵심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기획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젊은 세대가 살아가야 할 세계는 어떤 것일까요? 바로 ‘근대’라 불리는 세계입니다. 근대적 삶의 방식이란 기획project을 향해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요. 기획이라는 것이 곧 모더니티에 대한 첫 번째 정의입니다. 모든 근대인은 기획을 갖지요. 여기서 기획을 가진다는 것은 현재의 방식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기획을 품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니 우리는 몇몇의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기획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획은 아직 현실이 아니지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고,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언제나 실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잘못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기획을 실행하기는커녕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의 노력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데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요. 특히 신뢰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과연 각자가 지닌 능력에 맡겨둔 채, 모두에게 교육을 하거나 관심을 쏟지 않으면서 기획의 성공을 위해 모두가 매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여기서 근대의 기획의 핵심 특징, 즉 관리감독과 통제의 필요성이 도출됩니다. 신뢰의 문제와 실패의 위험에 맞서, 사건에 개입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성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러한 전략적 필요성인 바로 모더니티의 태동부터 동반되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고체 근대의 시대

모더니티는 300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계를 바꾸고, 사물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의무까지, 근대는 그 출발부터 기획투사의 과제를 안고 시작되었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근대 전체를 관통하는 인류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택된 전략이라는 것은 급격한 변화 속에 탄생한 것에 불과하고, 또 급격한 변화라는 것도 20세기 후반,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 전까지는 ‘고체 근대solid modernity’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고체 근대’라는 것은 우발적 사고, 만일의 사태,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사건, 때로는 놀랍고 충격적인 형세의 급변 등을 그저 잠깐의 짜증거리로 치부하는 태도를 취했죠. 그러면서 완벽히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완벽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완벽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르네상스의 창시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말했듯, “완벽한 상태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오직 나쁜 방향으로 가는 것”일 뿐 입니다. 따라서 완벽한 상태에서는 모든 변화의 노력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죠.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고체 근대’의 시기에 대부분의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은 이러한 완벽한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정보, 보다 많은 지식, 더 많은 기술 등을 얻는 것이 중요하고 믿었습니다. 이 때의 변화란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세계가 구축되기 전까지 요구되는 일시적인 방편으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또한 실천의 가장 좋은 방법은 선례를 따르거나 축적된 경험을 이용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습니다. 경험은 많을 수록 좋은 것이었고, 과거로부터 배운 지혜나 검증된 방식을 고수하고, 규범을 지켜 행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경직되고, 견고하며, 아주 느리게 변화하는, 혹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만 타당한 것이지요. 이러한 세계의 구조는 완고하면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여기에서는 아주 오랜 시기 동안 반복되어온 행동 방식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대가 양산한 최고의 모델이 바로 18세기 후반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 모델입니다. 판옵티콘은 병원, 학교, 군대, 감옥, 공장 등 많은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한 목적 하에 탄생한 건축학적 해결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모든 감방이 원형을 이루어 중앙을 향하도록 만든 아주 간단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감방의 죄수들은 중앙에 있는 감시자의 시선에 완벽하게 노출되도록 설계되어 있지요. 핵심은 감시와 통제가 소위 비대칭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감시자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자를 확인할 수 없지요. 그래서 죄수들은 늘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이 아이디어는 죄수들로 하여금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이미 간파했겠지만,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좋은 감시 체제란 ‘감시 대상자의 선택권을 최대한 없애는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있습니다. 감시를 당하는 자가 더 적은 선택지를 가질수록, 더욱 훌륭한 기획이 되는 것입니다. 선택의 기회도, 생각의 가능성도 적으면 적을수록, 상황은 보다 나아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형태가 ‘고체 근대’를 지배한 사회 운영의 핵심 원칙이었던 것이지요.



액체 근대의 시대

지난 40~50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고체 근대’를 거쳐 ‘액체 근대’의 시기로 이동했습니다. 액체성liquidity이라는 메타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오늘날을 액체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액체란 자신의 형체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는 물질을 뜻합니다. 사회적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것은 혁명적 변화의 태동과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이제야 막 보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이는 여전히 도래할 미래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첫 200년을 지배했던 흐름과 비교하면 이것은 분명 거대한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완벽한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변화는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역사상 최초로 우리는 변화 그 자체를 인간 삶의 영구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인 변화의 상태 속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행동 양식과 삶의 기술art of life을 습득하고 또 발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러니 선례를 따르라는 말은 더 이상 좋은 충고가 아닙니다. 지식을 쌓거나,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지혜에 의존하는 것 또한 좋은 제안이 아니지요. 습관이나 규범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이 모든 것들은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낼 뿐입니다. 더 이상 이 세계에는 하나의 지배적인 원리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원리들이 때로는 어긋나기도 하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양상을 보이지요. 이제 우리에게는 이러한 원리들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의 문제가 던져진 것입니다.


새로운 현상들이 속출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이 지적했듯이, 단기 고용의 형태가 등장하면서 노동 시장은 ‘유동적으로’ 변모했습니다. 고용 창출의 가능성은 끝을 고했지요. 누군가 르노, 포드, 푸조 등 유명한 자동차 공장에 취직했다고 할 때, 100년 전이라면 그는 대략 그곳에서 40년 정도는 일을 할 것이고, 결국 거기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마 평생의 공로를 인정받아 순금 시계를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제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세계 최고의 기업에 취직하여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일하게 된 몇몇 운 좋은 이들 조차도 당장 수개월 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프레카리아트화 정책’이라고 부른 구조적 불확실성과 위태로운 불안이 ‘액체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동하는 공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하나의 기획에서 새로운 기획으로

얼마 전 BBC와 인터뷰를 하면서 거기서 일하는 40대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16년 동안 방송사에서 일을 했지만, 한 번도 안정된 고용과 연금 보험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일을 한 것일까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전전하면서,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제대로 습득하지도 못한 채, 세계 곳곳을 뛰어다니기만 했다고 토로하더군요. 그가 습득한 유일한 기술은 가능한 빠르게 새로운 분야로 전환하고,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완전히 다른 능력을 별 불평 없이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각별한 친구들이기도 한 사회학자 뤽 볼탄스키와 이브 치아펠로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프로젝트의 도시cité par projets”라고 부른 현상의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일입니다만, 제가 학생이던 시절, 저는 사르트르의 “인생 프로젝트projet de la vie”라는 아이디어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삶 전체를 하나의 기획으로 삼으라는 명제이지요. 인생을 위한 프로젝트를 정립하면, 당신은 오늘, 내일, 다음달, 내년 등 착착 단계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계획을 세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삶은 안정되고, 계획된 이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말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충고를 하면 아마 비웃음을 살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프로젝트의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의 비극적 운명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는 온갖 기획들로 점철되어 있지요. 우리는 연속된 기획들 안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서 기획들이란 대개 단기 프로젝트들이며, 직전에 어떤 프로젝트를 했었는지가 지금의 나를 평가하는 주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액체 근대’는 기억 기간 또한 단기적이기 때문에, 지난 프로젝트의 성공 또한 그리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룬 성취는 축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은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이 만들어낸 사건들로 점철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핵심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면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동시에 세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현명한 행동 양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곤혹스러운 모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저의 그 꿈을 악몽으로 바꾸어버린 이유입니다.



모순적인 원리들

현존하는 위대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앞서 언급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한 장기적인 충성과 헌신을 갖는 것은 오늘날 아주 위험한 덫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기업이든 조직이든 그것이 제시하는 원칙들은 명목상 품위 있고, 윤리적이며, 인간적인 삶에 적합한 모습을 띱니다. 하지만 당신은 바로 그러한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원칙들에 의해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비인간적으로 쫓게 나게 되지요. 그렇기에 충성과 헌신이 깊을수록 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치 서류가방을 들고 여행하듯이 어느 정도 가볍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충성이나 헌신 따위의 감정의 짐들은 너무 많이 지지 않는 것이 낫지요.


하지만 저는 여기서 충성, 헌신, 인내 등이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오히려 칭송받아 마땅하지요. 문제는 이 세계가 우리의 이러한 마음들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으며, 또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부수적 피해를 낳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아주 ‘액체적인’ 해법을 고안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해방emancipation입니다. 여기서 해방이란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방의 실천은 당신이 속한 조직을 직접적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즉, 타인들의 말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건을 더 깊게 살펴보고 자신 만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숙고의 능력을 갖추는 것을 뜻하지요. 그러고 나면 중요한 두 번째 자질이 대두됩니다. 바로 개인적 책임이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진정으로 해방되고 나면, 즉 자신만의 숙고와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면, 그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할 필요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독립적인 주체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을 내포하지요. 내가 내린 위험한 결단이 초래하는 결과까지도 나의 책임이고, 기꺼이 이를 껴안겠다는 것이니까요.


그러고 나면 이제 두 가지 중대한 계율이 등장합니다. ‘협상 준비 태세’와 ‘대화의 기술’입니다. 최선의 해법들은 언제나 다른 의견들에 직면하여 어떻게 협상하고 또 대화하는가에 달려있지요. 아마 행동의 모든 순간에 여러분은 이와 같은 문제와 맞닥뜨릴 것입니다. 다른 의견, 다른 종류의 선호, 심지어 다른 가치들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하게 될 겁니다. 이때 여러분은 해방되고, 숙고하고, 개인적 책임을 질 필요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계율과 해법들을 통합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컨대 결국 ‘액체’ 근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세 가지 조건 속에 내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계산하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결코 측정되지 않는 지속적인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삶에는 늘 감당하기 힘든 변수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셋째, 신뢰의 위기 속에서도 과감히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은 믿을 만한 일들이 미래에는 비난받거나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단 일의 영역 뿐 만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실이기도 하지요. 이제 우리는 개인의 어깨에 지워진 책임의 무게를 넘어, 자기 결단과 해방의 자유, 거대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공동의 노력을 향한 책임의 ‘통각’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배우면서 잊어버리기

그렇다면 이제 배움이라는 또 다른 문제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란 ‘배움의 문화’라기 보다는 ‘망각의 문화’에 가깝지요. 새로운 것들을 위한 시야 확보를 위해 낡은 것들을 금세 쓰레기가 됩니다. 이것은 소비주의 산업의 모든 마케터들, 판매상들, 경영자들 등이 혈안이 되어 있는 주요한 이슈 중 하나이지요.


최근에 한 대기업의 휴대전화 광고를 보니, 이제 휴대전화의 잠재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 보이더군요. 사실상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상황이니까요. 그렇다면 휴대전화를 어떻게 계속 팔 수 있을까요? 그들 광고의 흥미로운 지점은 휴대전화를 소유하는 것의 가치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광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친구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휴대전화를 갖고 있진 않나요? 그렇다면 최첨단 기술이 탑재된 oo휴대전화를 사세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당신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윤리적 차원까지 광고는 틈입하였고, 소비주의의 물질은 우리에게 도덕적 신경 안정제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극도로 경쟁적이고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소비주의적 시장의 엄청난 억압이 이전까지 순리처럼 따랐던 것들의 가치를 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잘 작동하고 있는 컴퓨터를 몇 가지 추가된 기능을 이유로 던져버리는 거죠. 그것으로 오직 문서 작업만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새로운 음향 기술을 가진 이 컴퓨터를 사야만 한다는 압력을 계속해서 느끼는 겁니다. 행여 다음에 친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는데, 이 신기술 음향으로 음악을 틀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 될테니까요. 이것이 바로 배우면서 잊어버리기의 한 사례입니다. 물론 망각의 문제는 단순히 우리의 지적 능력의 실패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신속한 망각, 발 빠른 방향 전환, 새로운 물건이나 취향으로 갈아타기 등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우리의 정치인들은 ‘유연성flexibility’이라 부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빛깔 좋은 새로운 덕목들이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처방약처럼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액체 근대’의 이러한 특징들은 우리를 몹시 난처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창의적이어야 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하며,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해야 하니까요. 지금껏 노력한 공로와 그동안 이룬 성과를 누리며 태평하게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요. 배움이란 이제 평생의 과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배움이란 무엇보다 당신이 믿어 왔던 진실, 기술, 지혜 등을 바꾸는 능력까지 포함하게 되었지요.


20세기 위대한 인류학자 중 한명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1차 학습’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배움proto-learning은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의 상위 단계인 ‘2차 학습’은 다소 복잡한 형태를 띱니다. 이것은 일련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습의 과정 속에서 인지적 틀이 어떻게 자리를 잡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즉, 이 과정에서 배운 규칙들은 습관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틀 안에서 학습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독립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해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베이트슨의 사고는 여기서 더 나아가 ‘3차 학습’이라는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3차 학습이란 기존의 인지적 틀을 뒤흔들고, 원칙들을 거부하며,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재생산하는 방식입니다. 거의 병리적인 수준의 학습 과정이라는 것이죠. 베이트슨은 아주 노골적으로 이러한 능력은 광기의 징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글쎄요, 저는 그의 주장을 그저 반복하는 것일 뿐이겠지만, 그의 주장이 옳다면, 현대의 문화에는 광기의 낌새가 서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규칙을 깨고, 관습적 사유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지고, 기존의 궤도에서 벗어나 지금까지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유형을 창조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능력이야 말로 지금과 같은 세계에서는 최고의 적응적 가치가 되었으니까요.


이보다 30년 앞서 토마스 쿤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질 때에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혁명이 일어난다고 지적했지요. 패러다임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자명하고도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는 과학적 가설들의 집합이지요. 물리학, 화학, 생물학 할 것 없이 모든 과학은 패러다임을 갖습니다. 특정한 패러다임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수용되면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무한히 실증적 연구와 실험을 반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패러다임 그 자체를 의문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패러다임에 완전히 동화되면, 이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들은 잘 감지하지 못하게 되고, 그저 이상 변수들로 치부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쿤이 말했듯이, 현실이란 최상의 패러다임 보다도 훨씬 복잡한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이상 변수들이 계속해서 쌓이고 누적되다 보면 결국 그 패러다임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쿤이 말한 과학적 혁명의 순간이지요. 기존의 낡은 사유 방식이 허물어지고, 완전히 다른 형태가 그것을 대체하는 겁니다. 오늘날 사회로 눈을 돌려보면, 잇따른 인지적 혁명들의 발생 간격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베이트슨이 말한 “비정상적인 병리적 상황”이 오늘날 하나의 삶의 규범이 되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요컨대 제가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가 역사를 만드는데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서두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말처럼,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역사를 바꾸고자 마음먹는다면, 내가 떠맡게 될 일의 전망, 과제, 노동 등을 내가 속한 사회와 일상적 삶의 총체적인 맥락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의 첫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의 이동

고체 근대의 단계에서 기본적인 전략적 원칙은 약자를 그들의 책임 하에 종속시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강자는 책임을 독점하기를 원했지요. 그리고 약자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원칙, 명령을 그저 따라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책임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거대 집단으로부터 약자들에게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심지어 권력 집단의 상부에 있는 자들은 이러한 책임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애쓰고 있는 형국이지요. 거대 기업들의 총수들이 하는 행태를 보십시오. 회사를 파산시키고도 거액의 퇴직금을 챙기고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우리는 늘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책임이 “표류”하고 있으며, “책임이 주인을 잃어버렸다”고 노골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죠. 그 누구도 사회적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액체 근대’ 속에 내던져졌다는 미명 하에, 이러한 책임의 부재는 더욱 명백하고 분명한 진실이 되고 있어요. 먼 옛날, 집단적 실천을 꾀했던 이들의 과제는 약자들에게는 제한된 선택권을 주면서 책임의 무게를 그들의 어깨로부터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정확히 그 반대가 되었지요. 따라서 힘없고 소외된 약자들은 자기 결단과 해방을 무기로 삼아 거대한 위험을 무릅쓰고자 하는 책임의 소명을 발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출신의 위대한 프랑스 철학자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민주주의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교육기관으로서, 시민들이 끊임없이 자기 학습을 하는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이전과는 다른 삶의 양식과 사회적 비전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진정한 배움이란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이며, 견고한 지평을 뒤흔드는 도전이어야 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 지점에 희망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시대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그 속에서 누군가는 끝없이 파도를 거슬러 헤엄치고자 노력했고, 당대의 지배적 사유를 거스르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지금, 우리는 혁명적 배움과 삶의 기술을 체득하여 닿을 수 있는 미래를 향한 희망의 싸움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지그문트 바우만의『희망, 살아남은 자의 의무』는 5월 말에 출간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