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읽는 책 한쪽┃<해질녘 보랏빛: 히구치 이치요 작품선>



섣달그믐

-大つごもり (1894)



우물 도르래에 달린 두레박줄은 열두 길이나 되고, 부엌은 북향이라 섣달 찬바람이 쌩쌩 불어든다. 아, 못 참겠다 싶어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면 일 분은 한 시간으로 늘리고, 나무도막은 장작더미로 부풀려 야단치니 하녀 신세란 괴롭구나. 처음 이 집을 소개해준 할머니는 “자녀가 아들딸 모두 여섯인데 항상 집에 있는 사람은 맏이와 막내뿐이야. 사모님이 좀 변덕스럽긴 해도 눈빛과 안색만 잘 살피면 큰일은 없을 거고. 비위만 잘 맞춰주면 우쭐해지는 성격이라 잘만 하면 장식깃 반쪽이나 앞치마 끈 정도는 얻어 쓸 수 있을 거야. 재산은 동네 제일이라도 인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지. 다행히 바깥양반이 후한 편이라 조금이나마 용돈벌이는 생길 거야. 그 집에서 일하기 싫어지면 나한테 엽서 한 장만 보내. 자세히 쓸 필요도 없이 다른 데를 알아봐달라고 하면 발품을 팔아볼 테니까. 어쨌든 고용살이 비결은 주인의 겉과 속을 분간하는 데 있어”라고 하셨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싶었다. 어쨌든 ‘내 마음 하나에 달린 일이고, 다시 이 사람에게 신세지고 싶지는 않아. 조심조심 열심히 일하면 마음에 들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미네는 이런 괴팍한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

견습 기간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 이제 일곱 살 된 딸아이의 무용 연습이 내일 오후에 있으니 아침에 따뜻한 물로 씻겨놓으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날 서리 내린 새벽, 안주인이 따뜻한 잠자리에서 재떨이를 두드리며 “얘야. 얘야” 하고 불렀다. 이 소리가 자명종 소리보다 더 가슴을 놀라게 하니, 미네는 세 마디를 하기도 전에 일어나 허리끈보다 먼저 어깨끈을 부지런히 걸었다. 우물가에 나가니 수채 물에 아직 달빛이 어려 있었고, 살을 에는 찬바람에 잠이 확 달아났다.

욕조는 부뚜막 위에 붙어 있는 것으로 크지 않았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우려면 들통 두 개에 물을 넘치도록 담아 물지게로 열세 번은 오가야 했다. 땀을 줄줄 흘리며 물을 나르자니, 나막신 앞코 끈이 느슨해져 발가락을 들어야 걸을 수 있었다. 그런 나막신에 의지해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가려니, 발밑이 땅에 제대로 닿지 않아 수채 물 언 곳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옆으로 나동그라지며 우물 벽에 정강이를 부딪히니 딱하기도 해라. 눈보다 더 하얀 피부에는 보랏빛 멍이 선명하게 들고, 물통도 데굴데굴 구르면서 하나는 밑이 빠져버렸다.

물통 값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주인은 대단한 재산을 잃은 사람처럼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아침 식사 시중을 들 때부터 노려보는 바람에 그날 하루 종일 미네는 입도 뻥긋 못했다. 다음 날이 되자 사소한 일에도 잔소리를 하며, 집안 물건은 어디서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거나 주인 물건이라고 소홀히 다루면 벌받는다고 설교를 했다.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매번 일러바치니 어린 마음에 너무 부끄러워 설거지에서 소소한 집안일에 이르기까지 결국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게 되었다.

“세상에 하녀를 부리는 사람이 많지만, 야마무라(山村) 집안만큼 아랫사람이 자주 바뀌는 집도 없어. 한 달에 둘은 늘 있는 일이고, 사나흘 만에 그만두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룻밤 지나 도망치는 경우도 있지. 지금까지 거쳐간 하녀 수를 헤아려보면 사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뻔한 거 아냐. 그러고 보면 미네는 잘도 참고 지내. 저런 아이를 못살게 군다면 천벌받을 일이지. 도쿄가 넓은 도시라고는 해도 더 이상 아무도 야마무라 집안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기특한 것. 마음씨도 예쁘지.”

사람들이 미네를 이렇게 칭찬하면, 대개 남자들은 곧 “게다가 미인이니 더 바랄 것도 없지”라고 한 마디 덧붙였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