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바닥에 구멍을 뚫다 – 건축 일기 31


상량. 上樑.


대들보만큼이나 무거운 상량이라는 말의 무게에 한동안 짓눌렸다. 상량식을 끝내자마자 콘크리트가 양생하기를 기다린 하루를 제외하고 곧바로 공사는 진행되었다. 공사판이 건축일기를 써나가는 나의 사정을 봐줄 리는 만무했다. 나의 무딘 붓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정대로 착착 진행된 것이다. 이를 감독관이 작은 성취에 부푼 나의 정신에 나사라도 한번 죄는 것일까. 한마디 일침을 놓았다. “이제 큰 일은 끝냈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어!”


그동안 골조를 우뚝하게 세우는 게 허공과 다투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햇빛과 바람과 비와 친하게도 지내고 또 어떤 땐 싸우는 일이겠다. 천지간의 무량한 햇빛을 마음껏 즐기고, 바람을 알맞게 불러들였다가 내부를 일신한 뒤 순순히 내보내고, 막무가내로 들어오겠다는 비는 철저히 막는 것, 그것이 건물을 완성하는 요체라 하겠다.


앞으로 남은 공사를 대강이나마 적어본다. 전기, 통신, 소방 설비공사/조적공사/방수공사/미장공사/도장공사/위생설비공사/조경공사 등등. 1층의 한 귀퉁이를 대강 정리해서 상량식을 치룬 이후, 현장은 다시 혼란으로 되돌아갔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재들이 들이닥쳤다. 재질도 다르고 크기도 제각각인 파이프가 쌓였다. 다양한 전기선도 한편에 쌓였다. 이제 본격적인 배관설비와 전기입선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람의 몸으로 치면 이제까지의 작업은 뼈대를 세운 것이다. 이제 건물이 온전한 건물로 신진대사를 할 수 있도록 회로를 만들고 신경조직을 연결시켜야 한다. 건물을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면 그 안에 생명을 불어넣은 작업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또다시 현장은 건설의 망치소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1층에는 아예 작은 제철소가 마련된 듯했다. 절단기와 용접기가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하는 만큼 절단하고 이어붙여 복잡한 회로의 배관작업을 하나하나 완성해나가기 시작했다. 도면에 지시된 대로 제각기 알맞은 크기와 길이로 재단되어 요소요소에 각 배치되었다. 상량식 때 돼지머리가 놓였던 책상 위에도 이런 작업을 지휘하는 각종 도면과 도구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밀림처럼 지지대가 빽빽할 때는 각 층의 공간을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제 최소한의 지지대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자 비로소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을 끼우진 않았지만 창문들도 번듯하게 벽에 매달려서 어서 저를 보아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방과 복도와 계단을 거닐면서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설계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계획에 불과할 터, 앞으로 이 공간의 실제적인 용도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건물을 드나드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전기, 물, 가스 등이 오고가야 한다. 사람이야 문을 통해 방과 방 사이를 들고나겠지만, 전기-물-가스는 관을 통해 건물 사이를 오고가야 한다. 이들의 통로를 미리 콘크리트 타설을 할 때 관을 묻기도 하겠지만 요즘은 그리 하지 않는다. 양성된 콘크리트에 간단하게 원하는 만큼의 크기로 구멍을 뚫는 것이다.


이젠 계단도 나오고 복도도 나오고 문들도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장실과 탕비실에는 작업을 위해 구멍을 뚫는 위치가 표시되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하는 게 아니다. 도면에 그려진 대로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사이즈로 구멍을 뚫는 것이다. 그렇게 단단한 콘크리트가 드릴에게는 맥없이 제 살을 도려내주었다.


한편으로 콘크리트는 순조롭게 양성이 되었다. 물기를 버리면서 내면을 단단히 뭉친 콘크리트는 색깔도 조금 변하는 것 같았다. 한때는 물렁물렁 하던 물질이 건조가 되면서 자신의 단단한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양생이 다된 거푸집과 패드가 차례로 떨어져나와 차곡차곡 쌓였다. 이제 이들은 또 다른 공사현장으로 이동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몸을 빌려줄 것이다.


이제까지의 공사가 덧셈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뺄셈의 공정인가. 궁리의 건설현장으로 들어갔다가 힘을 합쳐 우뚝한 공간을 마련해준 거푸집과, 패드, 기둥. 그리고 각종 자재들이 그간 부여된 사명을 마치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들이 나오는 만큼 내부는 정리되고 그만큼의 공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거푸집을 만들고, 이를 이어 붙이면서 망치질을 하고, 나사를 조인 뒤 콘크리트를 쏟아붓던 작업자들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그이들은 그이들대로 또 다른 현장의 그 공사를 맡으면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각 공정의 도급을 책임진 이들과 시공사 간에 서로 약정한 대로 이미 계산을 끝낸 것일까. 큰 기중기가 와서 트럭에 이들을 실었다. 공간을 위해 그저 아낌없이 몸을 내어준 자재들이 아무런 미련 없이 궁리사옥 현장을 훌쩍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