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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초심을 생각하다 - 건축 일기 15


휴일이 아닌데도 현장은 하루를 쉬었다. 집을 짓는다는 게 분명 작은 일은 아닐진대 그걸 유효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건축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막상 현장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생각보다도 훨씬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겨났고 일기보다 훨씬 빨리 공정이 진행되었다. 흙을 다루고 기계를 다루는 전문가들의 솜씨가 고작 글이나 끼적거리는 자의 행보를 보란 듯이 치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쫓아가기가 벅찼다.


내 딱한 사정을 봐주기라도 하려는 듯 비가 왔다. 내딴에는 하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하루를 번 셈이다. 돌이켜보면 펜스를 치고, 꽃 심기를 하고, 동재하 시험을 하고, 파일을 박고, 시루떡처럼 정교하게 땅을 잘라내고, 버림 콘크리트를 치고, 먹줄을 긋고, 철근을 심을 준비하기까지의 과정이 참 순조롭게 흘러왔다. 내가 뭘 놓치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런대로 착착 맞물려 진행이 되었다. 설계도 맞춤하게 했고 때에 맞게 감리도 진행되고, 시공사도 기술력이 있다. 무엇보다도 나에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공사감독관이 있다.


버림 콘크리트를 치고 난 뒤 비가 오는 날. 공사장은 하루 쉰다는 연락을 받았더랬다. 오후가 되자 이런 날일수록 비 오는 현장의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리 많은 비도 아니었다. 자유로를 달려 현장으로 갔다. 먼 길을 앞두고 잠시 한 호흡을 가다듬는 듯 공사장은 달콤한 봄비에 젖어들고 있었다.


궁리는 파주출판도시의 2단지 중에서 제1블록에 속한다. 각 블록마다 지정 건축가가 있어 우리 구역은 성균관대학교의 석좌교수이자 도시건축설계사무소의 대표이신 조성룡 건축가가 총괄 지휘를 하고 있다. 굳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 시대의 뛰어난 건축가이신 분. (우리 궁리의 설계를 맡아주신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자주 기회를 가질 것이다.) 우리 블록은 총 6개의 구역인데 세화, 자음과모음, 보고사, 키움출판 그리고 궁리. 한 구역은 공공주차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중에서 세화는 벌써 준공을 해서 입주를 한 상태이다.


지금 나는 세화의 건물 3층 발코니에 서 있다. 세화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이곳에서 매일 한 컷의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계단에 대한 명상, 3층에 서면 3층에 대한 명상을, 발코니에 서면 발코니에 대한 명상을 하려고 한다. 아직은 그게 무르익지 않아 글로 옮길 처지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 건축 일기에 그 내용도 포함될 터이다.


오늘은 비가 오고, 비 오는 공사 현장을 찍는다. 비에 젖는 현장을 보는데 지금까지의 과정이 주르륵 되살아났다. 시공사를 선정하고 계약을 한 지 겨우 한 달. 그런대로 많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예상대로라면 다음 주말경이면 지하 기초공사가 끝난다고 했다. 빠른 진전이다.


설계도면이 기본을 잡아주기는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부딪히면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기도 해야 한다. 신경이 좀 많이 쓰이는 건 유리창이다. 설계가 마무리될 무렵 시공사 선정과 건축자금 등 나로서는 절박한 문제에 매달리느라 유리창의 크기와 높이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점이 떠오른 것이다.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바깥과의 소통, 그리고 통풍 등과 관련된 아주 민감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도시건축에서 어련히 설계해주셨을까 싶지만, 그래도 실제 공간이 갖추어지면 몸으로 앉아본 뒤 바깥의 풍경과 눈높이를 맞춰보고 가늠하고 확인해야 할 사항이겠다. 직원들의 취향과 앉은키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빗방울이 미끄러져 내리는 세화의 유리창을 보는데 그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것도 몰라 그저 백지상태였을 때, 처음으로 도시건축에 보냈던, 궁리의 희망사항을 적어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다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그때 가졌던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초심을 반영한 우리 건물에 보낸 우리들의 순정한 짝사랑.




------------------------------------------------------- < 자료 > -------------------------------------------------


궁리 사옥에 대한 제안 - 2013. 8. 8


도시건축 조성룡 선생님과 스텝 여러분께 몇 자 드립니다. 우리 궁리출판사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는 하셨을 것으로 믿고 파주 사옥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의논드리고자 합니다.


회사마다 자신의 뜻을 펼칠 공간을 가지려는 소망이야 누구나 가지겠지만 궁리 또한 그동안 많은 공간의 제약을 거쳐야 했습니다. 어쩌면 가지고 있는 공간에 우리의 뜻을 끼워 맞춘 측면이 없지를 않습니다. 우리 출판사는 그리 큰 규모도 아니고 과학전문 출판사로서의 그간의 성가를 토대로 앞으로도 이를 심화 발전시키는 것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일본 건축 기행에서 조성룡 선생님을 처음 뵙고 참으로 궁리 사옥을 위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간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이렇게 어렵더라도 끝까지 사옥을 완성하는 것으로 결심하고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전적으로 선생님을 믿고 의지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바입니다.


한편, 궁리의 재정 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리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라 최소한의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음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몇 가지 사정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사옥에 대해 적용해 주시면 좋겠다는 사항을 가감없이,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1. 사옥은 소박하되 외견에 별 치장은 아니 하면 좋겠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소재를 써서 시간과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건물을 만들어주십시오.


2. 전체 평수는 300평으로 해주십시오. 그 건평의 사용 계획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 궁리사무실공간 --- 60평 / 게스트하우스 40평

* 임대공간/전시공간 --- 100평

* 지하공간 --- 100평(주차 50평/창고 50평)


3. 각 공간별 사용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 궁리 공간 -- 대표실/편집실/디자인실/관리마케팅실/회의실/자료실 및 서고/기타

* 임대 및 전시 공간 -- 야생화 꽃 전시나 이벤트를 할 수 있는 공간

* 지하공간 -- 절반은 주차장으로 쓰고 절반은 책 보관 창고

* 게스트 하우스 -- 사람이 상주할 수 있는 공간/거실/방3/주방/다용도실/화장실2


4. 지하에서 지상으로 엘리베이터를 하나 넣어주십시오.


5. 건물 유리창은 책상에 앉아서도 바깥이 보여야겠지만 앉아서도 바깥이 보이게 해주십시오. 큰 유리창 아래 바닥 가까이에 작은 유리창을 내주십시오. 비가 올 때 작은 유리창을 바깥으로 밀어젖히면 빗소리를 사무실로 불러들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통풍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6.천정 활용 방안을 강구해주십시오. 해먹이나 반중력 운동설비를 설치하거나 큰 포스터나 걸개그림을 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7. 처마를 설치할 수 없다면 옥상도 편평하게 해서 공중정원을 꾸밀 수 있게 해주십시오. 사방마다 풍경을 설치해서 지나가는 바람을 붙들게 해주십시오.


8. 앞에서도 재정에 대해 말씀드린 것처럼 힘들게 사옥건설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건축비는 평당 300만 원 내외로 설계하여 주십시오.


9. 지상층 층별 면적이 각 60평 내외가 됩니다. 나머지 공간을 테라스 등 자연스럽게 전시공간으로도 활용방안을 강구해주십시오.


9-1. 궁리는 식물에 대한 공부를 앞으로 꾸준히 하는 동시에 꽃 사진에 관한 전시, 야생화 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식물을 궁리 사옥의 큰 주제로 설정하여 이에 관한 아우라를 많이 풍기도록 해주십시오.


9-2. 건물 옆에 큰 상록수를 심어 이 나무와 건물이 서로 의지하는 풍경을 연출하는 것도 어떨까 합니다.


10. 4층 주거공간(게스트 하우스)는 전면에 넓은 테라스를 조성하여 화원을 조성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또한 거실에 천창을 설치하는 것도 고려해보면 어떨까요?


11. 건물설비 중에서 1, 2, 3층 냉난방은 시스템냉난방(GHP), 4층 냉난방은 난방은 보일러, 냉방은 천정형 패키지 냉방기 설치하여 주십시오.


11-1. 궁리 전용 공간과 임대 전시 공간은 설비를 분리하여 설계하여 주십시오.


11-2. 건물을 짓고 나서 유지 관리비용 또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건물 단열설계 시 특히 주의를 기울여 주실 것과 미적인 부분을 고려하다 냉난방 설비에 차질이 빚지 않도록 세심하게 설계하여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12. 지난번 주신 설계 감리 계약서는 표준계약서로 감리 부분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정식 계할 때에는 감리 부분을 추가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상 우리의 사정을 욕심껏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시어 말씀드린 사항을 전향적으로 수용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앞으로 변동 사항과 추가 사항, 그리고 함께 의논해야 할 사항이 많으리라고 짐작이 갑니다. 그때마다 허심탄회하게 선생님께 전해드리고 상의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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