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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보르스카와 어머니


사진.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새보물 납시었네> 전시전. 2020. 9. 5. ⓒ 이굴기



머리맡에 두는 책은 진짜 머리맡에 그냥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번도 거들떠도 안 본 지가 오래인 책 몇 권. 마음은 빤하고 책이 표지만 닳았다. 그러나 예외가 가끔 있으니 쉼보르스카의 시집은 가끔 불빛 구경을 한다. 가끔 내 묵직한 한숨 소리가 어느 페이지에는 섞이기도 한다.


참 대단한 소재도 아닌 것 같은데 그저 주물럭주물럭 말을 가지고 놀았을 뿐인데, 한 가마니의 소금처럼 진한 앙금이 남는다. 가까운 데에서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발굴하는 시인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논어에 나오는 절문근사(切問近思.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것을 생각함)의 경지가 참으로 시쓰기에 절실하게 적용된 사례가 아닐까. 그 중에도 가끔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었다.


가까운 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건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일어나는 일

존재할 것이냐 사라질 것이냐

그 가운데 후자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을 뿐


(.........)


그러나 아주 이따금

자연이 작은 호의를 베풀 때도 있으니

세상을 떠난 가까운 이들이

우리의 꿈속에 찾아오는 것


-----쉼보르스카의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중에서


살아있는 것이 무슨 벼슬이거나 대단한 현상도 아니겠지만 눈 뜨고도 못 하는 일이 참 많다. 당장 자유로를 달릴 때도, 광화문 광장에서 열 발짝 앞으로는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는 못 가는 구역이다. 어제는 어제라서, 내일은 내일이라서 못 간다. 그렇지만 늘 없는 것으로 한쪽에 밀쳐놓지만 한밤중에는 꿈속이 있다. 그곳에 가면 못 이루는 일이 없다. 자연이 베푸는 작은 호의로 세상을 떠난 가까운 이들이 나의 꿈속에 찾아오지 않는가!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이러라고 시 읽는 것 아니겠나

추석 달빛 아래 홀로 있는데

시 한 구절 생각난다


추석 아래 휘영청 보름달도 다 밝지는 아니해서

한밤중에도 깊은 응달을 띄엄띄엄 만든다

심학산 아래 사무실

숙소로 가는 계단의 후방을 짚다가

어머니 생각이 물컹 났다


예전 어머니도 이 자리에서 더러 저 달을 보았지만

이제는 저 달 너머에서

달의 이면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무리 생각해도

저 달까지의 길이가

지름일리야 없는 것


허방을 짚고

따라나서는 어머니


계단을 다 함께 오르시더니

얘야, 오늘은 여기까지

열이 많아서 나는 밖에서 잘란다,

방으로 안 들어오겠다 하시네


오늘은 이렇게 꿈 바깥에서라도

잠깐 같이 살아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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