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시골의 기역자 초가집의 섬뜰. 따뜻한 햇볕이 몹시도 그리운 이 무렵쯤의 어느 날. 고방에서 어머니가 자루 하나를 들고 나오셨다. 한눈에 보아도 그것은 옴팡지게 무거워 보이는 자루.
돌절구 옆에서 나는 자루를 잡고 어머니는 콩이나 팥을 호박 바가지로 퍼서 보자기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거창읍 장에라도 가시려나. 그냥 확 부어 버릴 수도 있겠으나 양을 대중으로라도 어림하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맨마지막 한 톨을 퍼낼 때까지 완강하게 띵띵하던 자루는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이윽고 자루는 힘을 잃고 약한 바람에도 밑동이 흔들리다가 결국 허전한 팔랑개비처럼 흔들렸다. 자루의 힘은 자루에 있는 게 아니라 실은 자루가 부둥켜안고 있던 내용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 발밑으로 힘없이 풀석 주저앉던 자루.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 참 숱하게 매일 반복한 동작인데 막상 헤아려보니 어떻게 잠에 들었는지 도통 모르겠구나. 이젠 부실해진 몸에서 덜컹거리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나의 콩팥은 안녕하지 못하고 전립선은 진즉에 문제가 되었다. 한밤중의 호출을 피할 겸 꼭 화장실에 간다. 입으로 마시는 물도 방울방울의 집합이든 몸에서 나오는 물줄기도 실은 방울방울이다. 마지막에는 익은 밥알처럼 힘을 잃고 툭, 툭, 툭,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세상의 모든 물은 하늘에서 온 것들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닌 것. 이 세상에서 한 몸의 단독자로 살아가듯, 이 세계도 한 방울의 질서로 차곡차곡 이룩된 것.
자루같은 잠옷 바지를 잡으며 나는 느끼네. 그 옛날 콩이나 팥 알갱이가 하나하나 빠져나오면서 팔랑개비처럼 흔들리다가 종래에는 땅바닥에 자루가 주저앉듯, 이 방울방울들이 빠져나온 뒤 그냥 빈 자루처럼 풀석 제자리에서 주저앉는다네. 무릎 아래보다 더 아래로 이 몸자루도 내팽개쳐진다네. 그것은 미구에 들이닥칠 나만의 그것임을 희미하게 짐작해 보는 어느 한밤중.
보유. 아래 사진은 최근 간송미술관에서 경매로 내놓은 것을 문화재청에서 구입한 반가사유상이다. 이 희미한 미소조차 그윽하게 표정 아래로 숨긴 이 걸작은 나의 고향, 거창에서 출토된 것이라서 나는 더욱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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