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을 고려하자면 옳은 선택일까,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파주출판단지 조합에 가입하면서 집짓기는 시작되었다. 정중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 정말 부지를 사고 실제로 삽을 들어야 하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던 무렵이었다. 최종 조합원들의 명단을 보는데 이마가 썰렁해졌다. 함께 하기로 하는 줄로 알았던 알만한 출판사들이 대부분 탈퇴를 하지 않았겠는가.
모두들 집으로 들어가 쉬고 있는데 해 저문 저녁에 터벅터벅 길을 혼자 떠나는 불안하고 불편한 심정이 진하게 몰려왔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팽겨 둔 채 출판도시 건설 조합이 돌아가는 사정에 귀를 닫아둔 대가였다. 그저 조용하게 조합원 자격을 반납할 기회를 놓치고 난 뒤에 우물쭈물 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불행은 단체로 온다고 했던가. 때마침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환경 아래에서 출판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산업으로서의 출판은 그 규모가 피자에서 호떡만한 크기로 줄어드는 형국이었다. 냉랭한 여파가 궁리의 사무실로도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사정을 여기서 지금 낱낱이 팥을 세듯 고할 수는 없다. 어찌되었든 공사는 이제 시작되었으니 건물이 차츰차츰 올라가는 높이만큼 앞으로 그 이야기도 탑을 쌓아 나갈 것이다.
쉬운 일은 분명 아니었다. 일생 겨우 한번 경험해 보는 집짓기를 시작하면서 이를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기엔 조금 억울했다. 생각은 휘발유 같아서 그냥 배버려 두면 순식간에 증발하고 없어진다. 한번 도망친 그것을 불러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해서 이를 남겨두는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하다가 건축일기를 한번 이렇게 써보기로 한 것이다.
누가 보시랴, 했는데 몇몇 친구가 연락을 주었다. 이제까지 올린 몇 장을 사진을 보고 내놓는 반응이 어쩌면 똑 같았다. 우와, 운동장처럼 넓네!
아직 본격 공사는 시작되지 않아 정중동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부지. 사진기는 빛으로 찍기에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다. 사진 속의 저 운동장이 실은 다 궁리의 것은 아니다. 오늘치의 사진을 찍는 나에겐 궁리의 부지가 운동장이 아니라 논으로 떠올랐다.
지금 일하고 있는 세 명의 작업자. 한 명은 작업모를 쓰고 허리에는 망치를 비롯한 작업도구가 주렁주렁 달린 벨트를 찼다. 전문가의 냄새가 물씬했다. 다른 한 명은 줄자를 가지고 나머지 한 명은 도면을 보고 있다. 오늘의 작업은 파일심보기. 건물을 떠받칠 기둥을 박는데 그 위치를 정하는 것이었다. 궁리 건물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니라 총 51개의 파일을 박는다.
그이들은 붉은 피 같은 물감으로 위치를 표시하고 나일론 끈을 못에 감은 뒤 이를 고정했다. 그리고 나일론 줄이 교차하는 곳을 원점으로 삼고 도면에서 표시한 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망치에게 사정없이 얻어맞은 말뚝은 땅으로 푹푹 들어갔다.
쇠말뚝이 조금 특이했다. 그것은 자체로 무슨 힘을 받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며칠 후에 박을 파일의 위치를 표시하면 되는 것이었다. 눈에 잘 띄도록 바늘귀같은 홈이 뚫렸고 그곳으로 붉은색 끈이 묶여 있었다. 그게 마치 꽃처럼 보인다 해서 파일심보기를 현장용어로 꽃심기로 칭한다고 했다. 일을 하시는 분들은 위치가 제대로 맞는지 가끔 나일론 줄을 튕튕 퇴겨보기도 했다. 이윽고 몇 개의 말뚝이 나란히 줄을 맞추기 시작했다.
농사를 제대로 지은 적은 없지만 군대 가기 전 시골의 큰댁에서 모내기는 여러 번 했다. 논에 물을 가득 채우고 일렬로 죽 늘어서서 모내기를 할 때. 그 반달같이 넓은 논에서 일정하게 오와 열을 맞추기 위해선 못줄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그 나일론으로 만든 못줄에는 빨간 눈표가 달려 있었다.
못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줄눈을 표시하였는데, 벼의 종류와 논의 상태에 따라 12cm, 15cm 등 눈금을 달리하였다. 한 줄을 다 심으면 다음 줄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데, 많은 사람이 구역을 나누어 작업을 하고, 협동성이 요구되므로 매우 능률적이다. 또한 포기의 간격이 일정하고 줄이 바르기 때문에 통기성이 좋아 수확이 높고, 제초 등에도 능률적이다. 그러나 산간계곡의 계단식 논이나 면적이 좁은 곳에서는 줄을 넘기는 일이 번거로워져 능률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주로 평야지에서 많이 사용하던 방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함.
모두들 등을 굽히고 재빨리 눈표마다 모를 심고 나면 양쪽가에 있던 이가 “어이, 주울!”이라고 소리치면 못줄을 넘겼다. 그렇게 해서 오와 열을 잘 맞춘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 꿈꾸듯 나란히 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은 없었지만 먼지 날리는 대지에 붉은 나일론으로 묶인 쇠말뚝이 박히면서 차례로 오와 열을 맞춰나가는 쇠말뚝의 꽃들을 보자니 어쩌면 그렇게 모내기할 때 큰 역할을 하였든 못줄과 꼭 같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궁리사옥에 참여하는 작업자들도 고향에서 모내기를 함께 하였던 형제를 만난 듯 더욱 고맙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실명제라 해서 논에도 경작자의 이름과 벼의 품종을 적는 안내판이 붙기도 한다. 궁리사옥의 논에도 묘판처럼 파주시청으로부터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안내판이 내걸렸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던가. 이제 벼가 영글어 알곡으로 여물 듯 이 운동장 아니 논에서도 부디 꽃처럼 아름다운 집이 탄생하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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