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에 유럽 여행을 하게 된 가장 큰 동인은 베를린 발트뷔네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해마다 6월 말 베를린 외곽의 숲 속에서 열리는 필하모닉 콘서트는 전 세계 음악팬들이 기다리는 연례행사가 된 지 오래다. 올해도 6월 22일 토요일 저녁 8시 15분,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고,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했다.
영상으로만 보던 발트뷔네(Waldbühne)는 실제로는 생각보다 훨씬 생기발랄한 공간이었다. 히틀러의 심복 가운데 하나였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즈음해 설계한 공간으로, 올림픽 기간 동안은 체조와 권투 같은 경기가 열렸고, 또 문화행사도 열렸다. 우리로 말하면 잠실 올림픽 공원과 같은 공간인 셈이다.
하지(夏至)를 맞아 더없이 푸르른 실록이 만든 무대가 무척 부러웠다. 우리도 지자체가 주체가 되어 땅값이 싼 교외에 부지를 선정하면 이런 공간을 갖는다면 콘서트홀을 짓는 것보다는 큰 부담은 아닐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부터 청중을 들여 공연을 시작할 무렵에는 거의 착석해 기다리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우리 일행도 다른 사람들처럼 미리 가져간 샌드위치 따위로 요기를 했다.
단원들은 일찌감치 나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공연이 임박해서는 ‘파도타기 응원’을 선도해 청중의 참여를 독려하는 모습으로 여름밤의 흥을 돋웠다. 정말 흥미로운 점은 그 넓은 공간에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이는 공연인데 안내 방송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끄라는 둥, 쓰레기는 어떻게 해라, 또 화장실은 어느 쪽에 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다는 따위의 천편일률적인 소리가 귀를 왕왕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자발적인 질서의식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런 대비도 긴장도 하지 않은 가운데 정말 자연스럽게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와 사이먼 래틀이 걸어 나왔고,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유럽의 여름은 우리보다 훨씬 해가 길기 때문에, 멘델스존이 끝났을 때는 거의 9시를 향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하늘이 환했다. 야외 공연이기 때문에 당연히 마이크를 사용했지만, 그것이 부담스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게 들리는 것이 그동안 축적된 엔지니어들의 노하우를 보여줬다. 다른 야외 음악회들처럼 대형 스크린을 쓰지도 않았지만, 숲을 병풍으로 한 공연장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곡의 분위기에 따라 알게 모르게 울긋불긋 변한 무대 조명도 유치하지 않고 그윽했다.
사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올해의 프로그램이 좀 의아했다. 대개 발트뷔네 콘서트는 좀 친근한 주제를 가지고 짧은 음악들을 연주하는 갈라 콘서트 형식을 취했지만, 올해 예고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콘서트홀의 정규 프로그램 같기도 하고, 또 자칫 식상한 송년 음악회의 재탕처럼 비치지 않을까 싶은 우려도 들었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되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특히 합창 교향곡의 세 번째 악장에서 정말 아름다운 순간을 맞았다. 베토벤이 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느린 악장이 흐르는 동안 어디선가 날아든 숲 속 새들의 노래가 고조되었다. 마치 인간이 작곡한 최고의 화음과 자연이 만든 제일 고운 멜로디가 경쟁하는 듯한 순간에 청중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 또한 공연의 일부로 녹아드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제4악장, 기악으로 된 레치타티보를 마무리하는 바리톤의 일갈은 이런 내용이다. “친구들아, 이런 소리 말고, 좀더 아늑한 노래를 부르자”라고 할 때 그 ‘아늑함’(독일말로 ‘angenehm’)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바로 이날 밤이 아니었나 싶었다.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고, 온 세상이여, 입을 맞추자”는 감동의 합창을 부르는 가운데는 정말 숲속의 무대에서 만난 만국의 청중과 남녀노소가 하나로 묶였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연주된 많은 무대가 있었는데, 나에게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독일 통일을 맞아 베를린에서 마련했던 연합 콘서트와 더불어 이날이 제일 뜻 깊은 자리가 아니었나 싶었다. 공연 중에 사진을 찍는 것을 누가 말리지도 않았고, 앞 다퉈 소중한 순간을 휴대전화 속 작은 화면에 잡으려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지지도 않았다. 정말 그동안 잊었던 여유를 다시 찾은 특별한 경험은 베토벤의 음악 덕이었을까, 아니면 하짓날 베를린 숲이 만들어낸 요술이었을까. 둘 모두라고 해두자.
환호하며 박수를 그칠 줄 모르는 청중 앞에 사이먼 래틀이 마이크를 들고 섰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말에 모두 함께 감사했고, 늘 그렇듯이 베를린의 대기(大氣)를 찬양하는 파울 링케의 앙코르가 이어졌는데, 이때 원래 타악기 주자 출신인 래틀이 큰북주자와 자리를 바꿔 직접 북을 치는 유머를 보여줬다.
사이먼 래틀의 인사와 공식 앙코르 베를린의 대기
휘파람 가득한 숲속을 나오는 지난 6월 22일 베를린은 마침 밤이 가장 짧은 하지와 연중 제일 큰 보름달이 함께 뜨는 드문 날이기도 했다. 모두의 맘이 그랬다.
ⓒ 정준호. 2013. 07. 2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