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테마는 아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권력’과 ‘욕망’이 잘 투영된 또 하나의 공간은 ‘광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바뀌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여의도광장이 있었죠. 다른 나라의 다양한 광장과 비교해서, 우리나라 광장만의 특수한 특징 같은 것이 혹시 있나요?
동양의 광장과 서양의 광장은 출발이 다릅니다. 흔히 동양(중국, 한국, 일본 등을 말합니다)은 거리의 문화, 서양(주로 유럽을 말합니다)은 광장의 문화라고 하듯이, 과거 우리나라에서 광장이라는 단어는 생소했습니다, 대신 ‘광화문 네거리’ 혹은 ‘백주대로’ 등과 같이 ‘거리’가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럽의 도시는 ‘광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폴리스, 아고라 등이 대표적입니다. 유럽의 중세도시는 가운데 광장과 교회가 있어 이것을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그곳에서 정치적 자유토론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마녀재판’ 역시 그곳에서 행해졌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20세기 이후 식민지배를 갓 벗어난 제3세계 국가의 지배담론은 ‘민주주의’였으며, 그것은 평등, 자유 등의 행동규범을 말했고, 이를 다시 건축적으로 해석한 것이 ‘광장 문화’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 광장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그것을 담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마을광장과 다르게 정치권력이 마련해준 제스처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516광장(여의도광장) 그리고 서울시청 앞 광장, 또한 최근에 새로 마련된 광화문광장의 성격은 중세유럽의 성당 앞 광장과는 조금 성격이 다름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즉 유럽의 광장이 아래로부터의 광장이라면 우리의 광장은 위로부터의 광장이며, 그 형태 또한 자동차 도로 한 가운데 뚫린 섬처럼 생겨 접근성이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여는글’에 대학강사로 지내며, ‘아이들에게 배운다’, ‘학생들이 오히려 내 스승이다’란 옛 스승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간 독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집'이나 '건축'에 대한 여러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 중 재미있었거나 인상적인 질문 혹은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건축이 욕망을 담는 도구로 사용된 예가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당찬 1학년 여학생이 했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4인 가족을 중심으로 12평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는 현재의 모든 주거형태가 잘못된 욕망의 발로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자신과 동생 등 단란한 4인 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그 학생은 아버지가 지방공무원이었던 탓에 어려서부터 항상 정부에서 지정해주는 공무원사택에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거실을 겸하는 안방 하나, 동생과 함께 쓰는 자녀방 하나, 주방 하나, 욕실 하나로 이루어진 단란하고 간단한 12평짜리 사택이었고, 공부를 잘해서 고등학교 때부터는 특목고에 입학하여 기숙사생활을 하였는데 5평짜리 방에서 4명이 공동생활을 하였고, 지금은 2명이 함께 사용하는 4평짜리 대학기숙사에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4인 가족이 20여 년을 사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던 12평 아파트, 4명이 함께 사용했던 5평 기숙사, 2명이 사용하는 4평 기숙사 등의 예로 보건대, 생활에 필요한 주거면적은 1인당 2~3평이며 따라서 4인 가족이 24평이나 33평의 아파트를 사용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방공무원이었던 아버지, 특목고와 명문대학에서의 기숙사 생활, 단란한 4인 가족 등 그 학생의 삶은 나무랄 것이 없이 모범적이었고, 그가 주장하는 내용 역시 매우 일관되고 논리정연했던, 참으로 당차고 똑똑한 스무 살 여학생이었습니다.
집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 저러저러한 것은 잘못된 욕망의 발로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러저러하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의 책을 서른 몇 살 때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아주 편협한 세계를 세상의 전부라 생각하고, 모름지기 집이란, 건축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말했던 제 모습이 그 여학생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갓 대학생이 되어 서울생활을 시작한 스무 살 여학생, 제가 쓴 책이 서점에서 팔리는 것을 처음으로 보는 서른 살 글쟁이, 그리고 처음으로 강단에 서서 분필을 잡아보는 마흔 살 강사, 작은 것 하나를 이루어 놓고 세상에서 제가 가장 잘나고 똑똑하며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가장 정확하고 정당하다고 믿는 그 모습을 저는 거기서 보았습니다. 학생에게 배우는 가르침은 이처럼 뼈아픈 것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세요? ‘서재’는 아니시겠죠? ^^ 건축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면 우선 ‘공간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훈련을 합니다. 마치 소물리에들이 미각에 대한 섬세한 훈련을 하고, 연기 지망생들이 먼저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건축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감수성 훈련을 정말 열심히 해서, ‘정말 형편없는 건물이다’ ‘이건 거대한 콘크리트 쓰레기다’ 혹은 ‘사람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어머니 자궁 같은 건물이다’ ‘아무에게나 헤프게 웃는 싸구려 건물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건물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맥 빠지는 대답이 있나 하겠지만, 진실로 저는 건물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갖지 않습니다. 건축공부를 하게 되면 인간이 이렇게도 살 수 있는가라는 정도의 최하건물에서, 정말 인간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라는 정도의 최고건물까지, 그 하한과 상한의 폭을 상당히 넓게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일반적인 건물들은 모두 그저 그렇고 그런 건물이 되어 특별한 감흥이 없어집니다. 12평짜리 공무원사택과 120평짜리 타워팰리스는 크기 차이만 있을 뿐 ‘공동주택’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제가 가장 잘 지어졌다고 생각한 그래서 정말 좋아했던 건물은 도쿄 시청사 건물 앞에 있던 미쓰이(三井) 빌딩입니다. 그 건물을 정말 정말 좋아해서 7일간의 여행 기간 중 두 번씩이나 그 건물의 식당을 이용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별로 궁금해하지는 마세요, 우리나라 31빌딩하고 똑같이 생긴 평범한 건물입니다.
건축은 미적 감흥을 주기 위한 오브제가 아니라 기능을 담기 위한 도구이고, 그러기 위해 되도록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도시의 표정을 결정짓는 것은 ‘인간의 행위’이고 그 인간의 행위를 받아주는 일차시설은 가로수, 벤치, 공원 등과 같은 ‘스트리트퍼니처’이며 그리고 이차시설이 빌딩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행위가 가장 활발하고 화려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뒤에 서 있는 건물,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건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심을 가득 메우고 있는 ‘회색빛 박스형의 콘크리트 건물’을 제일 좋아하며, 그 이유 역시 ‘아파트’를 가장 좋아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건축의 자리는 제 삼선(The 3rd Line)’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제 일선(The 1st line)에 있어야 할 것은 인간(그 인간들이 지어내는 행위), 제 이선(The 2nd line)에 있어야 할 것은 그 행위들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스트리트퍼니처, 그리고 제 삼선에 있어야 할 것이 스트리트퍼니처를 지지해주는 빌딩이라 생각합니다. 제 삼선에 묵묵히 서 있다는 점에서 미쓰이 빌딩과 31빌딩 그리고 회색빛 박스형의 콘크리트 건물을 가장 좋아합니다.
"건축은 미적 감흥을 주기 위한 오브제가 아니라 기능을 담기 위한 도구이고, 그러기 위해 되도록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행위가 가장 활발하고 화려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뒤에 서 있는 건물, 나는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건물이라 생각한다."
『건축, 권력과 욕망을 말하다』를 독자들에게 간단히 소개한다면요? 내가 말하는 내 책은?
건축을 두고 ‘제7예술’이라고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건축을 예술의 한 분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심정으로 그 말은 ‘세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말처럼 들리곤 합니다.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세익스피어의 우수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지만, 인도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몇천 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국을 어찌 한 명의 극작가와 비교하는지 공분할 노릇입니다. 사실 이 말에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건축은 공학, 기술, 역사, 철학, 법, 예술, 사회, 풍습 등 실로 많은 것의 복합체인데 어찌 예술의 한 분야로만 생각하는지, 이러한 예술우월주의 내지는 예술지상주의적 시각에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은 건축의 많은 의미적 층위 중에 사회적 의미를 추적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당대의 지배계층이 민중에게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건축이 작용하는 기제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건축은 생활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실제 그것은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제가 쓴 내용이 건축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에는 이러이러한 측면도 있다 정도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건축은 ㅇㅇㅇ이다. ㅇㅇㅇ 안에 들어갈 말을 골라준다면? 나에게 건축은 ‘아파트’이다, 라고 말하면 ‘라디오 스타’ 버전이 되는 거겠죠? 농담입니다. ^^;; ‘첫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어릴 때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는 어른들의 질문에 저는 한 번도 대답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여섯 살 무렵 ‘아가씨’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전부였던 제가, 처음으로 ‘꿈’을 꾼 것을 열다섯 살 때입니다. 그때는 정말 간절히 건축가가 되고 싶어서, 일기장이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끝에 적는 내 이름은 ‘서 윤영’이 아닌 ‘서 건영’이었습니다. 결혼을 하면 아버지의 성 대신 남편 성을 따라야 하는 문화권에서 첫사랑에 빠진 소녀가 자기 이름 뒤에 그 남자의 성을 붙여 계속 불러보는 바로 그 몸짓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해서 건축학과에 떨어지고 재수를 해서 또 떨어지고 그래서 그냥 다른 학과에 가면서, ‘건축’을 아주 모질게 단념해버렸습니다. 단념의 벽은 사랑했던 깊이만큼 높고 단단한 것이어서, 저는 당시 건축을 ‘노가다 삽질’이라 부르며 폄하하고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가 문득 찻집으로 저를 불러내어 다시 건축을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느닷없는 질문을 하였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건축공부를 하기 위해 명지대의 대학원에 입학하자면 오래 다녀 익숙해진 직장과 고정된 수입, 안정된 미래 등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불투명한 입학과 졸업 및 그 후의 불안한 미래까지 짊어져야 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한 남자를 사랑하고 스무 살에 그가 나를 떠났습니다. 그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그깟 첫사랑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행복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눈부신 여름날, 더위에 지친 남편을 위해 영계 한 마리에 찹쌀과 대추, 인삼을 사 들고 급히 집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길이었습니다. 윤영아, 누군가 골목길에서 내 이름을 부릅니다. 돌아보니 바로 거기에 그 남자가 거기 서 있다면 어쩌겠습니까? 간단한 안부인사와 근황을 묻고 그가 주저하면서 내민 명함을 지갑에 넣고서 집으로 돌아가 태연히 삼계탕을 끓이겠지요, 그리고 며칠 뒤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걸어 차 한 잔을 마시며 이내 그의 어깨 위에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았음을 깨닫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인삼과 대추가 들어 있던 비닐봉투를 뙤약볕에 팽개치고 그 남자를 따라가는 데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름 뒤에 아버지나 남편의 성이 아닌 그 남자의 성이 붙는 것이 신기해서 몇 번씩이나 혼자 제 이름을 불러보는 소녀처럼, 책 제목을 불러봅니다. 건축, 욕망과 권력을 말하다. 굳이 ‘건영’이라 하지 않아도 그림자처럼 제 이름의 앞뒤에 따라 붙는 ‘건축’이라는 말이 아직도 저를 설레게 합니다, 이런 게 첫사랑이겠지요? <끝>
사진 ⓒ 서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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