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안동 암산에서. 2020. 10. 4. ⓒ 이굴기
어릴 적 동네 이발소는 제법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내외하는 남녀처럼 여성은 미용실에, 남성은 이발소로 그 들고남이 엄격히 분리되었다. 고민이 많은 것과 머리카락이 무성해지는 것은 그리 큰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없는 살림에 그것은 왜 이리 빨리 자라는가.
아무튼 이발소는 새로운 문명의 발상지처럼 나에겐 각별한 곳이었다. 신문 구독도 어려운 형편에 그곳에 가면 의자에 나뒹구는 부산일보를 볼 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신문소설이 각광받던 때였다. 제목은 모르겠는 정비석의 연재 대중소설을 흘깃 본 것도 그곳이었다. 상당히 파격적인 삽화에 소위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시절의’ 머리에 각인된 뒤 지금도 안 잊히는 문장이 있다. 질펀한 연애가 끝난 뒤 게으르게 올라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내뱉는 주인공의 혼잣말이었다. 모든 쾌락의 뒷물림은 허무야!
당시 이발소는 요즘처럼 사양산업이 아니었다. 이발사 혼자 하기에는 감당이 안 되어서 이발사 둘에 면도하는 아가씨, 머리 감겨 주는 아저씨가 따로따로 있었다. 이른바 각각 전문가가 담당하는 이른바 전문 체재를 갖추었다. 어린 눈에도 솜씨를 가릴 줄을 알아서 좁은 의자에 앉아 대기하면서 내 머리카락을 손볼 사람이 누구인가 통박을 재기도 했다. 꼼수를 부려 내 차례에 기술이 서툰 조수가 내 담당이라도 될랴치면 슬쩍 순서를 미루려고 화장실을 찾았던가.
그간 머리카락의 자라는 속도만큼 내 교양과 지식이 커졌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들쭉날쭉하던 내 공부와는 달리 머리카락은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자랐다. 해서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이발소를 다녀야 했다. 그러니 텔레비전에서 동네 이발소가 무대로 등장하였을 땐 잘 아는 장소인 듯 해서 특히 반갑기도 하였다.
팔도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하는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어느 연속극. 직업이 이발소에서 머리를 전문으로 감겨주는 사람이 맞선을 보고 와서 주인에게 말한다. 이제 나도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고 그러니 좀 전문가 냄새가 나는 직책이 필요하지 않겠냐며 승진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조금은 같잖은 눈으로 흘기던 주인이 봉급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냉큼 이렇게 선심을 쓴다, 좋다. 너 내일부터 세발과장이야!
세상은 변하고 시간은 흐른다. 그러니 몸도 달라지고 쓰는 말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카락 드문드문 흩어지니 우리는 누구나 사는 기술이 발달해서 전문가가 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연속극도 재미있지만 산에 가는 것도 재미있다. 텔레비전 속의 연속극이 기획되고 연출된 굉장히 빨리 전개되는 것이라면 산에서 벌어지는 것은 아주아주 느린 드라마.
산에 가면 사람보다 많은 게 풀이다. 그 풀을 보고 아, 풀이네 하는 것보다 와 애기똥풀이네, 하면 조금 전문가의 냄새가 나지 않은가. 담 너머 전깃줄에 새 한 마리가 앉았다. 전깃줄이야 옛날 그대로다. 그건 한눈에 보아도 참새하고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와, 노랑지빠뀌새 좀 보소, 하면 그건 제법 세상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세상을 그악하게 만드는 것도 이 세상을 말아먹는 것도 모두 이른바 전문가들의 소행이다. 그런 전문가들이야 논외로 치고, 지금 어디서 모하시는지 모르겠는, 두번째 데이트 갈 때 어깨에 제법 힘을 주었을 그 세발과장님같은 전문가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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