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연재를 시작해서 그동안 쌓였던 글로 근근이 이어오던 차에 이제 비축분이 다 떨어져간다. 이쯤해서 이 지면이 어찌 시작된 것인지 밝힐 때가 된 듯하다.
궁리칼럼과의 인연은 바로 나란히 심리학 글을 쓰고 있는 정재곤 선생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권유라기보다는 선생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알고 내가 부러워 청했다. 정재곤 선생은 오래 전 내가 출판사에 잠시 있을 때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전기를 번역 의뢰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되었고, 애초에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던 정 선생은 내 애청자가 되었다. 짧은 만남으로 끝날 뻔했던 연이 음악 덕분에 다시 이어진 것이다.
연재 시작 뒤에 몇 차례 프랑스에 있는 정 선생과 이메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정 선생은 역시 음악 애호가인 아내와 딸이 음악과 함께 읽을 수 있는 내 글을 좋아한다고 덕담해주었다. 그러길 바라고 시작한 것이니 다행이다. 마지막 편지에서 나는 화요일의 심리학 칼럼과 목요일 음악 칼럼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했다. 거창한 계획이 있어야 하려나 고민하던 차에 마침 흥미로운 소재가 나왔다. ‘화요일의 심리학 스물네 번째 이야기, 정신적 교류’가 그것이다.
정 선생은 본인은 기독교와 무관하다는 머리말로 시작해서 ‘크레도’라는 예배 전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펼쳤다. 나는 선생과 달리 기독교와 썩 무관하지는 않다. 학창시절 사오 년 정도 성당을 다닌 추억이 성년이 되어서도 꽤 또렷하다. 두뇌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였으니 그때 외운 기도문과 한번이라도 부른 성가 가사는 아직도 고스란히 대뇌피질에 각인되어 있다.
정 선생은 크레도 가운데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 communion)을 믿으며”라는 구절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 말은 동방과 서방의 모든 교회 나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교회가 서로 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라틴어로는 아래와 같은 부분이다.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
그런데 어릴 때 외웠던 이 ‘사도신경’은 한참 뒤 성인이 되어 우연히 성당을 갔을 때 조금 바뀌어 있었다. 기도문의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고, 그동안 사용하던 사도신경을 4세기 니케아 공의회 때 수정한 기도문으로 교체해 미사를 드렸던 것이다. 위의 부분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음 같이 풀이되어 있다.
Et unam, sanctam, cathólicam et apostólicam Ecclésiam.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으며
문제의 ‘통공’(communio)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어졌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이 변화의 의미를 섣불리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가톨릭’(‘보편적’이라는 뜻이다)이라는 말의 범위를 교회 스스로 축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 음악사의 많은 음악가들이 미사 통상문에 곡을 붙였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음악은 미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음악가에게도 미사의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 대부분이 ‘크레도’의 경우 ‘통공’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사도신경이 아닌, 통공이 빠진 ‘니케아 신경’ 쪽에 가사를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바흐의 위대한 미사를 통해 그 부분(동영상의 재생 8:27분부터 끝까지)을 들어보자.
대개의 미사곡을 통해 들을 수 없는 ‘통공’이라는 말은 파생되어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바로 ‘영성체’(Communio)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밀떡과 포도주를 신도들이 나눠마심으로서 복음 안에 하나가 되는 미사의 핵심 예식이 바로 영성체이다. 미사 통상문 가운데 영성체에 해당하는 음악이 따로 있지는 않다. 그런데 죽은 자를 위한 미사 레퀴엠 가운데에 이 ‘코무니오’ 악장이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가운데 마지막 악장을 들어보자.
모차르트 서거 200주기 추모 공연, 게오르크 숄티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이 영성체 음악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Lux æterna luceat eis, Domine, cum sanctis tuis in æternum, quia pius es.
Requiem æternam dona eis, Domine;
영원한 빛을 저들에게 비추소서, 주님.
당신은 자비하시니 당신의 성인들과 함께 영원히 머무르게 하소서
이런 저런 음악을 들으며, ‘통공’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정재곤 선생이 왜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한 것일까 궁금했다. 빈 성 슈테판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져 200년 전에 쓸쓸히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의 음악에 온 세상이 한 마음이 되고, 바흐의 ‘크레도’ 음악에서 굳이 라틴어 가사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두 대의 오보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손을 맞잡는 화성에 공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통공이라는 어렴풋한 개념의 가장 근사한 예가 아닐까.
음악과 심리학의 대화를 위해 일단 어설픈 딴죽을 걸었다. 정 선생이 어떤 반응을 해올지 독자들과 함께 기다려보아야겠다.
ⓒ 정준호. 2013.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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