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길 위의 편지』는 국내 초역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 작품을 골라 번역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A. 15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독서 모임이 있어요. 6년 전 그 모임의 한 회원이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을 추천해 함께 읽었는데, 그 책에서 울스턴크래프트의 『길 위의 편지』를 알게 되었어요. 솔닛이 두 면의 짧은 지면에 풀어놓은 소개글은 매혹적이었어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여성의 인권을 앞장서서 주장한 페미니스트로만 알고 있었는데, 저자의 순탄하지 않았던 삶과 여린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죠. 실연, 아이, 자살, 북유럽, 윌리엄 고드윈, 메리 셸리가 키워드였고, 저는 이 저자가 돌을 갓 넘긴 딸을 안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북유럽 국가들을 어떻게 돌아다녔을지 정말 궁금하더라구요. 무엇보다 저자의 미래의 남편인 고드윈이 이 책에 대해 남긴 독자평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독자가 책을 읽고 나서 저자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저도 그 느낌을 받고 싶어 원서를 찾아보았고 번역에 대한 욕심을 품었어요.
Q.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우리에게는 『여성의 인권 옹호』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의 인생은 어떠했나요?
A. 고전의 정의로 유명한 명언이 마크 트웨인의 말일 거예요. "사람들이 칭송은 하지만 절대 읽지 않는 책"이라고요. 이름 있는 저자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칭송하지만 거의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질문하신 것처럼 저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해서는 『여성의 인권 옹호』의 저자라는 사실밖에는 아는 바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책의 번역을 계기로 전혀 예상치 못한 저자의 면모를 알게 되었어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열정과 의지로 똘똘 뭉친 아이였어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로 이뤄냈어요. 그것도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요. 부자님 마나님의 말동무, 귀족 자녀들을 위한 가정교사, 여성들을 위한 학교 건립, 전업 작가가 되기까지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울스턴크래프트에게는 큰 약점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집착이었죠. 울스턴크래프트는 10대 때 한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어요. "내가 첫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라고요. 자신의 가진 재능과 끈기로 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었지만, 사람 관계, 특히 남녀 관계에서는 첫째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울스턴크래프트는 자립에 필사적이었던 만큼 사랑에도 필사적이었어요. 자신을 첫째로 보아주지 않는 남자들을 편지로 괴롭혔어요. 그렇게 하면 사랑이 더 떠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거죠. 울스턴크래프트가 연인들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저자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스토커 같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그런데 또 재미난 것이 저자의 그런 집요함이 성숙한 글쓰기로 이어졌다는 거예요. 사랑을 잃으면 많은 이들이 글을 쓰잖아요.
Q. 『길 위의 편지』는 스물다섯 통의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이 형식으로 쓰게 된 특별한 까닭이 있을까요? 18세기 당시에는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텐데, 북유럽을 다녀오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A. 서간체 여행기는 18세기 출판계에 흔한 장르였어요. 울스턴크래프트는 조지프 존슨이 창간한 잡지 <분석비평>의 보조 편집자이자 검토자로 날마다 글을 썼기 때문에 출판계의 유행을 잘 알고 있었어요. 게다가 편지는 울스턴크래프트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형식이었어요. 당시 편지는 오늘날로 보자면 SNS였어요. 많은 작가들이 편지로 소통했고, 소통을 잘하고 싶은 욕심에 글을 더 잘 쓰려 노력했죠. 울스턴크래프트는 영리한 사람인 데다 생계형 작가였기에 여행 준비 단계부터 책 출판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좀 황당해요. 사실 울스턴크래프트는 도박하는 심정으로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나 싶어요. 바람을 피운 연인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 지 일주일만에 떠난 여행이었거든요. 그의 연인 임레이는 돈을 쫓는 속물적인 남자였어요. 때마침 프랑스에서 은괴를 싣고 예테보리로 가던 배가 실종돼 임레이에게는 도난당한 보물선을 회수하기 위한 협상가가 필요했어요. 임레이는 울스턴크래프트의 담대함과 실력을 믿었고 사랑에 목매는 이 여인을 잠시 떼어놓을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작동해 여행을 부탁했어요. 울스턴크래프트로서는 목숨을 끊으려 한 판에 그깟 여행이 뭐 대수일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어쩌면 이 여행이 소원해진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게 했어요. 물론 기대는 물거품으로 변했지만, 그 물거품은 『길 위의 편지』를 탄생시켰어요.
Q. 스물다섯 통의 편지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보였던 울스턴크래프트이지만 정작 사랑하는 남성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작아지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A. 이 여행기의 내용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자연 풍광, 각 나라의 사회 풍토 그리고 저자의 우울한 속풍경이에요.
울스턴크래프트가 전하는 북유럽의 자연은 장엄하고 때로 그림처럼 아름다워요. 저는 구글 검색으로 몇몇 지역을 둘러보았는데, 예산과 시간을 들여 저자가 지나온 길을 밟아보고 싶어요.
이 여행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저자의 논평이에요.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관찰과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이국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전반에 대해 과감히, 때론 지나치게 분석하고 비판해요. 언급하는 주제들은 실로 광범위해요. 교도소 개혁, 사형제도 반대, 자유와 평등 옹호, 숭고함과 아름다움에 관한 미학 이론, 여성의 해방과 교육, 프랑스 혁명이 유럽 대륙에 끼친 영향, 상거래가 사회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 산업 자본주의와 도시 빈민의 상관성, 사생아 부양에 대한 책임 등등. 한 명의 독자로서 저는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변호사들, 사실을 부풀리고 왜곡하는 언론,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법조계, 일시적 동정에 기댄 근시안적인 자선에 대한 비판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그가 오늘날에 살았다면 SNS 셀럽이 되었을 것 같아요. 어떤 주제를 던져도 답이 자판기처럼 나오거든요. 저자의 이런 거침없음이 부럽더라구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남자에게 버림받은 불행한 여인임을 암시하며 감성적이고 의존적이고 때로 미성숙한 면모를 보일 때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어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사랑받고 싶어하는 아이로서의 울스턴크래프트를 보았어요. 저도 여성이자 엄마이기에 훌쩍이는 저자를 접할 때면 그저 쓰담쓰담 해주고 싶었어요.
Q. “나는 평범한 길을 가려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한 울스턴크래프트는 ‘새로운 족속의 시조’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여기서 ‘새로운 족속’은 어떤 여성상을 가리키는 걸까요?
A. 버지니아 울프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글을 쓰고 싶어하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매년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고요. 울프는 그 길을 개척한 사람이 울스턴크래프트라고 보았고, 그의 삶을 "하나의 실험"이라고 불렀어요. 18세기 성인 여성이 갈 수 있는 길은 극히 제한적이었어요. 결혼을 하거나,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는 것이었죠. 울스턴크래프트의 눈에는 어느 쪽이든 남편과 고용주에게 매여 사는 부속물의 삶이었어요. 하여 그는 그런 평범한 길을 거부하고 경제권을 가진 자립 여성의 삶을 꿈꾸었어요. 그것이 '새로운 족속'이었고, 결국 그 길의 '시조'가 되었어요.
Q.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 중 특히 에디션F 시리즈에 함께하고픈 작가와 작품이 있으면 살짝 귀띔 좀 해주세요.
A. 작년에 정말로 재미나게 읽은 책이 있어요.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이에요. 그 책에서 제가 전혀 몰랐거나 알았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몰랐던 많은 앞선 나간 여성들을 만났어요.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저자가 『19세기 여성』이라는 책을 쓴 마거릿 풀러였어요. 울스턴크래프트만큼 담대하고 용기 있었던 이 여성의 글이 왜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더라구요. 그 작품을 살펴보고 싶답니다.
또 작업해보고 싶은 작품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오로라 리(Aurora Leigh)에요. 저는 시를 좋아해 날마다 한 편이라도 읽는 편인데, 이 작품이 시로 쓴 소설이라고 해 꽂혔어요. 내용도 재밌더라고요. TV 소설 같아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시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이 작품을 읽지 못하게 했다는 거예요. 여성의 의식과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불온한 서적이라는 이유로요. 시라서 번역이 쉽지 않겠지만, 도전해보고 싶어요.^^
Q.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세요.
A. 이 책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여성의 인권 옹호』의 저자로뿐 아니라 다층적인 면모를 지닌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창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어요. 더 나아가 울스턴크래프트를 "새로 알게 된 사람처럼" 좋아하게 되면 더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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