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밖에서 만난 작가ㅣ<라디오 키즈의 탄생>을 펴낸 김동광 박사 인터뷰



Q. ‘라디오’ 하면 텔레비전이 등장하기 이전 1960년대에 황금기를 맞이하며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매체로, 이제는 좀 한물 간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들려주신다면요? ‘라디오’를 언론과 방송학 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기술문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는 취지가 인상적입니다.


A. 영국의 기술사학자 데이비드 에저튼은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라는 책에서 기술이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자전거 생산대수가 자동차보다 많고, 모기장은 단순하지만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말라리아로부터 보호해주는 중요한 기술입니다.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신문이나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아직도 도서 문화의 주류는 종이책이지요.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이 단순히 정보 전달로 환원될 수 없으며, 대중매체는 저마다 그 자체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디오는 주류 매체는 아니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고즈넉한 밤 시간 책상 한 귀퉁이에서 음악과 교양, 그리고 긴급 상황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라디오는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과학기술사회학자로 라디오 방송이 아닌 라디오라는 기술이 가지는 사회적 및 문화적 측면들을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기술은 어느 사회에서든 수용되는 궤적을 갖지요. 우리의 경우, 라디오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과 전쟁을 거쳐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르는 격변기에 해당합니다. 말하자면 근대사의 고달픈 굴곡을 고스란히 함께 거친 셈이지요. 그 과정에서 특히 금성사 A-501 라디오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를 거치면서 ‘국산 1호 라디오’라는 독특한 지위를 얻습니다. 따라서 금성사 A-501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주인공이 등장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들을 살펴보는 것에서 책이 시작합니다.

Q. ‘라디오 키즈’는 ‘라디오 소년’, ‘라디오 보이’를 모두 통칭하는 이름 같은데요, 이들은 단순히 라디오라는 매체를 사랑하고 즐겨 듣는 이들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디오 소년’ ‘라디오 보이’ 그들은 누구인가요?

A. 우리나라의 라디오 기술문화에서 중요한 행위자들로 저는 흔히 자작가나 애호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조명하려고 했습니다. 가령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과 전쟁 전후에 걸쳐 일제 폐품이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부품으로 광석 라디오를 조립하던 장사동 키드,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라디오를 공보 수단으로 삼기 위해 농어촌에 라디오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라디오를 유선방송 매체로 적극 재활용한 라디오 소년, 60년대 이후 안정된 전자 부품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자작 활동을 했던 라디오 보이 등이 그런 주역들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라디오 기술문화를 일궈낸 주역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사동 키드와 라디오 소년은 당사자들이나 당시 언론에서 사용한 것이었고, ‘라디오 보이’라는 명칭은 제가 시기적 특성에 따라 시험적으로 붙인 것입니다. 실제로 일부 라디오 동호회들에서도 이런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훗날 과학기술부 장관이나 대기업 임원, 그리고 전자 산업의 중추적 인물들로 성장해나갔다는 점에서 고도성장의 기틀을 다져진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일본의 기술사가인 유조 다카하시도 일본의 전자산업 발달에 아마추어 자작가, 라디오 애호가, 부품 수공업체 등 이른바 ‘비공식 부문’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했지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런 분들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 평가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역사적으로 라디오는 많은 나라에서 공보(公報)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했는데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몇 가지를 들어주신다면요?

A. 라디오가 처음 등장한 시기가 양차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라서 많은 나라에서 라디오가 공보와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자연스럽게 이용되었지요. 특히 문맹자가 많던 시절에 신문보다 라디오가 훨씬 효과적인 매체로 여겨졌습니다. 더구나 신문은 지방에까지 보급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라디오는 전기만 있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었지요,


우선 루즈벨트 대통령은 1929년 대공황을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라디오를 활용한 인물이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사람들이 벽난로 주위에서 즐겨들었던 ‘노변담화(爐邊談話)’라는 이름의 담화는 유명합니다. 히틀러도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라디오를 선전도구로 삼기 위해 값싼 국민라디오를 보급했고, 괴벨스는 ‘국민의 시간’을 만들어서 집단 청취를 강요했지요. 가까운 일본도 ‘국방수신기’라는 값싼 라디오를 보급했고 아마추어 무선가들이 애국무선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농어촌라디오 보내기 운동과 스피커 보내기 운동을 적극 수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Q. 하지만 라디오가 단지 개발독재의 공보수단으로 활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쓰임새가 더 역동적으로 확대되었다고 했습니다. 라디오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켰는지요?

A. 기술은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변화되곤 합니다. 이것을 ‘사회적 구성’이라고 하지요. 라디오 기술도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의도와 달리 이용자들에 의해 재구성되었습니다. 이런 재구성 과정에는 당시 사회적 및 문화적 맥락이 크게 작용합니다. 우리나라는 당시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술 입국’이라는 애국주의의 경향이 강하게 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일차적으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 전국민과학화 운동 등에 의해 추동되었지만, 당시 전파과학사, 라디오기술사 등 기술 출판사와 《전파과학》, 《학생과학》과 같은 잡지들도 이러한 애국주의의 주장에 호응했습니다. 애국주의는 당시 거역할 수 없는 문화였으니까요. 따라서 경제성이나 실용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자작문화에서도 두드러졌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진 70년대 이후 라디오보이 세대에서는 과거에 비해 취미로 즐기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프라 모델 키트나 무선조종 비행기 조립과 같은 분야들이 활성화되었습니다.


Q. 라디오 보이로서 저자는 라디오 자작(自作)의 즐거움을 흠뻑 맛본 시절이 있습니다. 그때 경험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신다면요? 설령 자신이 직접 남땜을 하고 라디오를 조립하지 않았다고 해도, 라디오를 중심으로 한 자작 문화가 우리 시대를 형성한 중요한 요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저는 사실 입문자에 불과하고요. 워낙 고수들이 많아서 저는 명함도 못 내밉니다. 집이 가난해서 국민학교 시절(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고 했지요)에는 청계천을 뒤져 《학생과학》이나 《전파과학》 과월호를 한아름 사다가 읽고 되팔고 했습니다. 새 책을 사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이 시절에 제가 살던 서울 중구 광희동 집 근처에 있던 아카데미과학사, 조금 떨어진 필동에 있었던 합동과학교재사를 뻔질나게 찾아갔지요. 그런데 돈도 없고 워낙 부끄럼을 많이 타서 문 앞에서 진열장 창문으로 들여다보기만 했습니다. 용돈을 모아서 합동과학사에서 거의 처음 출시된 나무로 된 지프차 키트를 사서 조립했던 기억이 납니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그러니까 1966년쯤에 로켓트 광석라디오를 처음 접했지요. 중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라디오 뿐 아니라 와이어리스 마이크, 트랜시이버 등을 조립하느라 세운상가에 드나들며 열을 올렸습니다. 공부 안 하고 딴짓한다고 형들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요즘 메이커 운동을 비롯해서 단순히 기업들이 만든 물건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어 쓰려는 움직임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자가 수리 운동도 활발합니다. 제품을 뜯을 수 없이 만들어서 간단한 수리도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새 제품을 사게 만드는 대기업들의 일방적 횡포에 맞서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혁신이나 발명은 항상 이런 자작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애플의 창시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도 당시 컴퓨터 자작문화를 대표했던 홈브루 클럽의 주요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작 문화는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기술 문화의 미래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Q. 이 책들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세요.


A. 며칠 전에 세운상가를 둘러본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곳이 재개발 여파로 철수하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아직도 많은 점포들이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종로통 번화가에서 불과 골목 하나만 들어서면 여전히 수많은 부품점들이 나름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점포들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만한 수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첨단기술만이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술 문화에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함께 공존합니다. 마치 종로의 삐까번쩍한 대로에서 몇 발자국만 들어서면 노포(老鋪)들이 나오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들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첨단 이데올로기는 정작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우리에게 중요한 기술인지 잊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디오가 지금껏 사라지지 않고 소중한 매체로 사랑받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라디오는 마치 종로 큰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몇 걸음만 들어가면 나타나는 세운상가의 오래된 전기 부품점들처럼 요란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기술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폴 매카트니의 <정크>라는 노래에서 고물상에 있는 많은 물건들이 “왜, 왜?” 하면서 자신이 정크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라디오 기술문화는 고단했던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전쟁통에 피난민들은 이불 속에서 숨죽여 라디오로 전황의 추이를 듣고,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들으며 즐거워했지요. 또한 비단 스스로 땜질을 하면서 라디오를 만들지 않았더라도, 함석 물받이에 클립을 끼우며 이리저리 라디오 방송 신호를 찾던 광석라디오, 소풍을 갈 때 빠질 수 없었던 야전(야외전축), 세운상가라는 독특한 공간 등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공유된 기억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제 곁에서는 50년이 넘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아직도 정겨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