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밖에서 만난 작가│『운명, 책을 탐하다』를 펴낸 장서가 윤길수 인터뷰



Q. 『운명, 책을 탐하다』를 펼치니, 오래된 책들 속에서 마치 아련한 지향(紙香)이 풍겨 나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쓰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나는 그동안 수집한 장서 14,636권을 정리해서 『윤길수책』(2011)이란 한국근현대도서 목록집을 펴낸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자료를 토대로 그동안 계간지 『문학선』에 2014년부터 6년간 연재된 글 중에서 월북문인들의 것을 제외하고 한편을 새로 추가하고 보완해서 엮은 것입니다. 내용은 장서가로서 책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화와 평소 책과 문학에 대한 내 생각을 담고자 했습니다. 나는 인류가 만든 발명품 중에 으뜸은 ‘불과 문자’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문자를 담는 그릇인 책이 없었던들 지금처럼 발전된 문명을 기대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책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물이요, 인간의 삶과 꿈을 담아낸 ‘아름다운 공예품’이라 생각하고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입니다.


Q. 부제가 ‘한 장서가의 탐서 생활, 50년의 기록’입니다. 무려 반 백년간 책과 서점을 가까이 하며, 다양한 책들을 모아오셨는데요, 처음 서점에 가셨던 기억이 떠오르시는지요? 그때 풍경을 그려주신다면요.


A. 1968년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방과 후 학교 근처 헌책방에서 우연히 정지용 시인의 시편을 접하고 받은 감동은 바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서점 주인의 소개를 받아 정지용 시집을 구하기 위해 인사동에 있는 고서점 경문서림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서점주인 송해룡 선생은 그런 책이 없다며 나를 서점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는 황당했던 일이지요. 그 이유를 나중에 송 선생한테 들었지만 나를 종로경찰서 형사가 보낸 프락치로 알았다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정지용과 같은 월북문인들의 책은 금서로 거래가 불가능할 때였습니다. 이 일은 내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나는 이분의 도움을 받아 장서가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Q. 특히 한국문학 분야의 책들을 수집해오셨습니다. 그중 중요한 책들을 한번 꼽아주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그리고 왜 한국문학 쪽에 집중하시게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A. 내 장서목록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문학만 집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방면의 책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 편의 시나 소설 등 문학 작품이 주는 감동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내가 모은 장서 중에서 중요한 도서를 몇 권 꼽아본다면, 최초의 양장본으로 거론되는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과 최초로 문화재가 된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1925)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 『정지용시집』(1935), 김기림의 『기상도』(1936), 이광수의 『무정』(1925), 이태준의 『가마귀』(1937)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이중에서도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책을 한 권만 꼽으라면 단연 『정지용시집』일 겁니다. 그만큼 정지용은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Q. 윤 선생님을 책의 세계로 이끌어준 경문서림 송해룡 선생님과의 긴 인연이 참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송 선생님은 윤 선생님에게 어떤 분으로 기억되는지요?


A. 한마디로 학원의 강단이 아닌 서점에서 만나 사숙한 스승이랄까. 그분은 상인의 기질과는 거리가 먼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아주 강직한 분이셨습니다. 책에 대한 지식이 강단에서 활동하는 학자를 능가할 정도로 박식하셨는데, 이분의 가게는 장만영, 어효선, 김구용, 신경림 같은 문인은 물론 하동호, 김윤식 교수 같은 학자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구해주고, 파지장으로 들어가는 고서들을 살려 보존한 그야말로 문화재 지킴이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요.


Q. 책을 둘러싼 환경이 정말 격변하는 요즘입니다. 오랫동안 책의 세계를 지켜봐오셨는데, 책의 운명은 어떠하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나는 전자책이나 들려주는 이야기책과 같이 책의 환경이 바뀌더라도 종이 책의 운명은 영원할 거라 확신합니다. 오랜 세월 책을 수집하다보니 책은 읽기 위해서만 존재하진 않습니다. 문자를 담은 내용은 책의 구성요소 중 절반에 불과하다는 생각입니다. 나머지는 장정에 필요한 종이의 재질이나, 활자, 잉크 색깔, 디자인, 제본방식 등이 차지할 것입니다. 책은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기능은 기본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고 장정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즐길 수 있고, 종이의 냄새도 맡을 수 있는 오감을 지닌 공예품입니다. 세월이 지나도 숙성된 포도주와 같이 그 향기가 배가될 것입니다. 지금 시장에서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이나 백석의 『사슴』 그리고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초판본들은 억대를 호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이 책의 가치는 정보 전달의 기능만 가진 전자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Q. 그동안 수집한 장서들을 정리해 2011년에 『윤길수책』이라는 한국근현대도서 목록집을 펴내신 적이 있습니다. 혹시 이 장서들을 바탕으로 또 다른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A. 『윤길수책』은 개인의 장서목록이기도 하지만 개화기 이후 한국근현대도서 100년의 역사를 처음으로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는 데 그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입니다. 2014년 문체부에서 실시한 국립한국문학관 자료소장 실태조사보고서를 보면 『윤길수책』은 근대문학의 유산에 있어 개인 소장자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도서를 소장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목록집을 발간하고 나서 한때는 사회에 환원해서 공유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 글을 쓰며 활용하다가 자식에게 물려줄까 합니다. 책이 도서관에서도 천덕꾸러기로 홀대받는 시대에 괜찮은 가내문고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Q. 이 책들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A.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내가 왜 유독 책에 빠져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책을 모으면서 위로받고 지금 아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정지용 시인을 만난 것은 내게 있어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 운명적인 만남을 즐겼을 뿐입니다. 그런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험하고 힘든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해야 할 몫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