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밖에서 만난 작가┃<만신 김금화>를 쓴 김금화 나라만신


Q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A 『만신 김금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만신>이 곧 개봉할 예정이라 언론 시사회, VIP 시사회 등등 다양한 모임에 나가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VIP시사회에서는 관객들과 한국 영화의 발전을 위한 굿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영화에 출연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직도 기분이 얼떨떨합니다.


Q영화 <만신>을 시사회 때 보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A∥ 문소리, 류현경, 김새론, 세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제가 굿을 할 때 못지 않게 너무 잘 해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세 배우가 마치 한 사람인양 열연을 해서 감동받았어요. 2011년에 박찬경 감독이 내 자서전을 읽고 찾아와 내가 살아온 삶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길래 사실 자신도 없고 이를 어떡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지요. 그냥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해야겠다 마음먹었고요. 좀더 젊고 건강할 때 찍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Q부제에 있는 ‘비단꽃’ ‘넘세’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의미들이 있는지요?

A∥ ‘비단꽃’은 제 이름인 ‘금화(錦花)’를 풀어쓴 거지요. ‘넘세’는 제가 둘째딸인데, 집안에서는 아들이 태어나길 원했죠. 그래서 남자로 태어날 동생이 ‘넘석한다’(어깨너머로 들여다본다는 뜻)고 해서 제 이름을 ‘넘세’라 지었대요. 제가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큰댁에서 ‘촌스럽게 이름이 넘세가 뭐냐’고 하며 ‘금화’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넘세’ 이름 덕분인지 남동생이 태어났지요.


Q1967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해서 ‘연평노래’와 배연신굿 공연으로 개인상을 받으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습니다.

A∥ 평소 굿에 대해 무엇인가 남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조상님들이 소박하게 장독대에 물 떠놓고 ‘명주시오, 복을 주세요’라고 기원하던 것이 왜 어느 날 갑자기 미신이 되어버린 것일까? 외국의 문명과 문화는 그렇게 떠받들면서 우리 것은 왜 배척을 하는 걸까? 수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요. 그래서 나는 우리 전통 굿을 잘 받들고 원형 그대로 후대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경연대회에 나가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내가 무대에서 춤을 추면 카메라 초점이 맞춰지고 내가 부르는 노래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가져주었죠. 그야말로 다른 세상, 다른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신께서 그간의 고통에 위로의 손길을 얹어주시는 것처럼.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조금씩 매스컴을 통해 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에는 연평노래를 부르는 것이 KBS에도 소개되었지요. 난생처음 해보는 텔레비전 출연이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넘세가 스타가 되어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기뻐해주었어요. 간혹 시기를 하는 무당들은 내가 나오는 걸 보고 채널을 돌리며 무당 망신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국내외 민속학자들 사이에서 ‘김금화’라는 이름이 알려졌고, 저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Q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문화사절단으로 첫 해외 공연을 하셨습니다. 주최 측의 무속에 대한 편견으로 공연 무산 위기도 겪으셨다면서요? 그때의 에피소드 좀 들려주세요. 

A∥ 1981년 어느 날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미국에서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공연이 있는데 안 가겠냐고 우리 민속에 관심이 많았던 에밀레박물관 관장 조자용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었죠. 흔쾌히 그러마 하고 미국에 갔는데 영사관 사람들이 우리 옷차림을 보곤 ‘나라 망신 시킬 일 있냐’면서 공연을 못하게 하는 겁니다. 공연들이 거의 끝나가고 관객들은 하나둘 공연장을 빠져나가는데 조자용 선생이 우리를 떠밀어서 무대에 올라갔어요. 죽기살기로 한두 거리 굿을 하고, 작두를 탔어요. ‘우리 무속문화를 이 미국땅에 제대로 선보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랬더니 박수가 쏟아지고 관객들이 춤추고 아주 난리가 아닌 거예요.


공연 끝나고 이제 돌아가겠다고 하니 영사관 사람들이 붙들고 늘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2회씩 공연을 하면서 미국에서 26일 동안 공연을 한 기억이 납니다. 이를 기점으로 스페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과 중국, 일본 등을 다니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널리 알려왔습니다. 제 고향이 황해도라 서해안에 접해 있어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을 주로 선보였지요. 


Q관객들이 영화나 책을 보고 만신이나 굿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으면 좋을지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이야기해주세요.

A∥ 아마도 관객이나 독자들이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다고 하여 굿에 대해 금방 이해하기는 힘들 거라 생각됩니다. 아주 옛날에는 무속을 굉장히 중요시했고 토속신앙이자 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미신타파의 움직임이나 새마을운동 등 때문에 시련과 곡절을 무척 많이 겪었어요.


굿은 모든 것을 정화합니다. 한이 맺혔던 것도 풀어주고 화도 풀고 굿을 통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마음을 신선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주지요. 아픈 손자를 낫게 해달라며 소복을 입고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다른 이들의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무당의 모습이 참으로 비슷합니다. 어쩌면 굿은 우리의 삶, 일상생활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보살피고 거둬주라고 비는 방식이 다를 뿐,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와 같은데, 굿을 배척하고 무당을 왜 무서워하는지…… 


Q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A∥ 저에게는 주로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이 많이 찾아온답니다. 그러면 저는 그분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래도 잘 안 될 때는 욕심을 버려라’ 하고 말해줍니다. 그래도 힘들게 느껴지면 ‘정말 어려운 고비가 지나면 바로 좋은 일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라고 하지요. 가장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는 것은 ‘머잖아 좋은 일이 온다’는 증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