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밖에서 만난 작가┃몸짓하는 사람 '달가'


Q독자들에게 첫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A안녕하세요? ‘달가’라고 합니다. 마임하는 ‘강지수’라고 인사드리면 혹시 아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달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궁리와 길담서원, 그리고 청소년 친구들과 함께 『몸, 태곳적부터의 이모티콘』이라는 청소년 인문학 책을 작업했습니다. 반갑습니다.



Q달가에게 ‘몸’은 ‘제1의 언어’일 듯합니다. 마임이스트로 활동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을 듯한데요.

A1994년 초에 춘천마임축제를 만든 유진규 선생님께 연락이 왔어요. 마임극단을 만들 예정인데 같이 해보자고 하셨죠. 당시 저는 극단76에 속해 있으면서 연극과 퍼포먼스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위퍼포먼스를 하시는 무세중 선생님께 탈춤 등 우리 철학과 민족예술을 공부하고 있었죠. 다시 서양식 마임을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극단 대표님인 기국서 선생님이 저를 불러다 ‘어디든 가서 배우고 헌신해라.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만난다.’ 딱 한마디 하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결국 ‘유진규네 몸짓’ 창단멤버가 되었죠.


사실 1987년 연극을 시작할 당시부터 막연하게라도 이왕이면 몸의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하지만 입구를 몰라 서성이는 시간을 보내며 혼자 판토마임 작품을 만들어 극단 선배들에게 보이곤 했었죠. 수소문 끝에 뵌 적도 없는 유진규 선생께 마임을 배우고 싶은데 어쩌면 좋겠는지 여쭤보는 편지를 춘천으로 보내기도 했었죠. 몸으로 얘기를 건다는 것. 움직임만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뜻을 공감하게 한다는 게 무척 매력이 있었어요. 현학적일 것 같고……. 보통 열아홉 그 나이에는 묵직하고 뭔가 있을 것 같은 걸 추구하지 않나요? 하하, 저도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가 6월 대항쟁이 있던 정치격변기의 시대였고 김남주 선생의 투쟁시를 읽고 또 읽고, 채플린의 <독재자>라는 영화를 보고는 뭔가에 가슴이 벅차오르다 그의 천재성에 약이 올라 우울해지곤 하던 때였죠. 극단 선배들은 시사풍자만화가인 주완수 선생의 <보통고릴라>라는 작품을 연극으로 준비하고 있었고요. 그때 주변 상황이 그랬어요. 어느 날 우연히 그 당시 꽤 활발하게 활동하던 퍼포먼스 작가 임경숙 선생의 솔직하고 아픈 시(詩)와 행위가 온갖 색으로 칠갑이 되는 퍼포먼스를 보고는 ‘저런 거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릎을 치기도 했죠. 여하튼 1994년 ‘유진규네 몸짓’의 일원이 되어서 그해 5월 춘천국제마임페스티벌에서 첫 작품을 공연했지요.



Q평소, 활자와 친하신가요? "내 인생의 책"을 꼽는다면, 어떤 책을 선택하시겠어요?

A저는 남들 차분히 공부할 때 무대와 길에서 떠돌듯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위 청춘초입에 인문학적 스승을 모시고 ‘내 인생의 지침이 된 무엇을 얻었다’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네요. 어려서는 집에 책이 많지 않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보이는 대로 읽기에 열중했어요. 친구네 가서 못 읽어본 책을 많이도 빌려다 읽었어요. 어머니는 매년 어린이날 선물로 서너 권의 책을 한꺼번에 사주시곤 했는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땐가 어머니의 학창시절 애독서였다고 하시면서 정치근 선생의 『젊은 날의 노우트』를 선물해주셨어요. 어려웠죠. 뭔가 단아함이 있는데 당시 그 이상은 모르겠는 거예요. 그런데도 유독 이 책은 쉽게 포기가 안 돼서 결국 군대까지 가지고 가서 읽은 뒤에야 책의 값어치를 알게 되었죠.


사실, ‘세상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던 책은 고1 여름방학 때 읽었던 이문열 씨의 단편이었어요. 『젊은 날의 초상』에 실린 「들소」라는 작품이었는데 너무나도 아프고 실감나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그 작품으로 세상에 대한 비관적 시선을 뚜렷하게 갖게 되었는지 몰라요. ‘뱀눈이 아닌 무력한 그가 뻔한 내 미래의 모습일 텐데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결국은 이런 구조의 현실세상 속을…….’ 이러면서 끙끙댔어요. 아파서 저며지는 마음은 아직까지도 진행형입니다.


그 이후에 『단』, 『백두산족 단학지침』으로 시작해 『한단고기』나 최창조 선생님의 『한국의 풍수사상』 같은 책을 읽으면서 학교 역사공부가 너무 싫어졌어요. 지금이야 ‘요하문명론’이니 하는 인문학 책이 여럿 나와 있다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어요. 끓어오르는 가슴을 쥐고 갑갑함을 느꼈죠. 엉뚱한 놈 취급받고 그랬어요. 고2 때 단전호흡 수련을 하면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친구들을 꼬드겨 자퇴하고 수련의 길을 가려 시도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 저는 자퇴에 실패하고 엉뚱한 친구 둘만 학교를 떠났는데 선동하던 제가 없으니 그냥 대학진학을 하더군요. 한 친구는 오랫동안 ‘너 때문에 도사도 못 되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다.’고 농담조로 투덜거렸지요. 지금 그 두 친구는 오히려 잘 살고 있습니다. 하하. 그러다가 제대 후에 읽은 조영래 변호사님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라는 책이 저를 사회적으로 철들게 했어요.


Q첫 작품이 1994년작 <판쵸우의>입니다. 어떻게 이 작품을 만들게 되셨나요?

A음……. 작품 만들게 된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에요. 특히 몸짓공연은 보는 분들의 상상이 자유롭게 작동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제가 다 이야기하면 그 내용에만 갇혀버려서 재미없는데…… 어쩌죠? 제목도 많은 고민을 하다가 다루는 오브제명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듯이 말이죠.


그래도 이야기를 조금 드리자면요, <판쵸우의>는 어느 날이어도 좋은 그런 날 거리를 걸어가는 한 남자의 등 뒤로 가방이 날아들면서 시작됩니다. 남자는 ‘뭐야 이게?’ ‘누가 장난하나?’ 싶지만 내 것도 아니고 갈 길도 바쁘고 해서 가방을 되던져주고 갑니다. 그런데 가방은 다시 남자에게 날아들죠. 가방을 되던져주고 가려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날아온 곳을 살펴보는 순간 가방은 또 남자의 얼굴로 날아들죠.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는 화남과 호기심에 가방을 열어보고 그 속에 있는 넓은 천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뭐지? 살펴보는 남자에게 천이 살아 있는 듯 갑자기 달려들어 그 남자를 먹어치웁니다. 괴물에게 잡아먹힌 거예요. 사내를 잡아먹은 괴물은 자신이 담겨 있던 가방까지 먹어치웁니다. 한참 뒤에 가까스로 탈출한 남자는 땀으로 뒤범벅이 된 자신과, 괴물은 사라지고 널브러져 있는 그 천을 보며 망연자실합니다.


이야기 소재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느 시대든 사회비리가 많잖아요? 특히 국민세금을 가지고 놀고들 있는 권력자는 언제 사라질까요? 그 당시도 그랬어요. 수천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일개 세무서에서 여당 대선자금으로 댔다는 뉴스를 보는 순간 차라리 화도 안 났어요. 오히려 국민이 고분고분 세금을 내니까 이런 일이 생긴다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어요. 세금 후불제를 해야 한다 이러면서. 한 폭밖에 안 되는 천이 무슨 수로 괴물의 몸이 됐겠어요? 먹힌 자가 있으니 가능한 거죠. 어리석고 멍청하게 먹혀주니까. 너무 분하고, 무섭고, ‘세상이 이렇다, 알고는 계시냐!’라고 외치고 싶었어요. 분명히 우리는 당했는데 피범벅으로 드러나는 상처도 없고 세금 수천억이 사라졌는데 당장 내 통장의 돈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이런 사건은 또 사람들 기억에서 잊힐 테고, 그 괴물은 시대를 거듭해서 또다시 등장할 테고.


당시 해외공연에서는 ‘한국의 과거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여러 번 받았어요. 노코멘트라고 하다가 결국 웃으며 ‘그 이상이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나네요. 제가 사용한 판쵸가 군용물품이었기에 더 그랬던 거 같아요. 



Q우울증을 오래 앓았다고 하셨습니다. 몸짓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요?

A우울증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돼요. 하하, 그런데 정신과에 가면 약부터 먹이니까 심리 상담치료부터 받는 게 좋겠죠. 마음이 아프게 된 원인을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니까요. 요즘 들어 더욱 크게 알려진 ‘즉문즉설’ 하시는 한 스님이 계시죠? 그분의 말씀을 찾아 들어보니 자기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 우울에 빠져들려 하는 순간, 딱 정신 차리게 도와주시더군요.


몸짓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거예요. 우울하면 몸 쓰기가 안 돼요. 다 무슨 소용인가, 싶잖아요? 뭘 쳐다보기도 싫어지죠. 그리곤 생각 속으로 더 빠져들어요. 자기 무덤을 파는 거죠. 마음이 병들면 탁한 생각의 지배를 받게 돼요. 잘난 자기 생각에 휩싸이죠. 대체로 나와 남의 마음을 살피며 사는 겸손한 분들은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잖아요? 그런데 나와 남의 생각을 살피며 살았던 저 같은 사람은, 마음과 생각의 다름을 몰랐던 어리석은 경우였어요. ‘그게 그거 아니었어?’ 이러면서 말이죠. 결국 내가 틀렸던 걸 깨닫고 난 후 지금의 저는 아직도 실수를 자주하지만, 마음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건 행복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는 게 첫 번째예요. 당연히 여태껏 해오던 전공자들의 몸짓연기수업의 기본 흐름부터가 바뀌었으니까요.



Q『몸, 태곳적부터의 이모티콘』에서 마임사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그중 권력자ㆍ독재자가 대중의 생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며 존재하더군요. 이러한 풍토는 불행히 지금도 여전합니다. 근래에 온갖 상념에 젖었을 듯한데?

A<판쵸우의>에서 많은 얘기를 했는데요, 90년대는 이 작품 연출의도에 ‘보이지 않는 힘과 권력에 의한 상실하는 자아, 요구되어지는 획일화’라고 꼭 썼어요. 보는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을 연상시키고 싶었어요. 그러다 이천년 대에 들어서 공연할 때는 ‘어느 날’이라는 사회의 일상성에 주목하는 부제를 달았죠. 사회문제 즉, 대추리 주민문제나 불법해고 근로자투쟁현장에서 더 많은 공감을 얻고 받아들여졌고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정치권력에 대하여 직접 말하고 싶은 일들만 벌어집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건 저 하나뿐일까요. 용산참사 때 몇 예술가들의 공연이 그 현장에서 진혼제처럼 진행되었는데 기획자가 제 연락처를 수소문했더라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어요. 그 사실을 모른 채 현장에 가볼 용기도 없어 혼자 마음으로만 울고 있었던 게 너무 안타깝고 후회가 되었습니다.



Q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몸짓놀이교실’을 열고 계십니다. 어린 친구들과 함께하며 느끼는 점이 많을 듯한데요.

A내가 어른이라는 게 참 미안하고 참담하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에게 무책임하게 굴어도 되는 세상은 신도 아무도 허락한 적이 없잖아요. 어른이 다 나쁘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런 짓을 하는 모두는 어른들입니다. 저는 특히 광고가 보기 싫어 TV 없이 산 지 오래인데요. 아이들은 그런 유의 현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구분할 능력이 아직 없어요. 90년대 초 어느 분유회사의 광고 문구가 이랬습니다. ‘우리 아이는 다르잖아요?’ 그 광고를 본 이후, 저는 무서운 어른들에 대해 이를 갈고 살았습니다. 우려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청소년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하면서도 정작 그 원인을 해결할 생각도 의지도 없습니다. 지금 상황은 더욱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죠. 이런 사회의식의 근본을 고쳐잡아 맑게 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결국 학교도 교육도 인문도 철학도 다 무용지물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보습학원의 대형걸개 광고를 보면 학생 신분을 오래전에 벗어난 지금의 저도 위축감과 죄책감이 들 정도입니다. ‘여기 다니는 애들의 결과는 이랬어! 넌 대체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니? 이 한심한 녀석아.’라며 노려보는 듯하거든요. 살인을 한 죄인도 사형당하지 않는 사회에서 막 피어난 연초록빛 아이들이 왜, 시험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에 스스로 사형 선고를 내리게 되었을까요.


최근에 굳게 마음먹은 게 있어요. 바쁜 아이들은 몸짓놀이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거예요. 요일별로 학원을 네다섯 개나 다니면서도 두세 가지의 방문교사학습지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침에 원어민강사의 모닝콜을 받으며 깨어나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 아이들은 마음을 열고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제안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요. 저는 그런 똑똑이 넘치는 아이들 앞에서 캄캄한 미래를 봅니다. 그 아이들이 제게 보여주는 반응이라곤 ‘재미있다’와 ‘없다’의 이분법뿐이고요, ‘정답은 뭐냐’는 식으로 매사 호흡이 짧아요. 이런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대체로 ‘이게 다 네 인생을 위해서’라고 철저히 세뇌시켜놨어요. 저를 대하는 태도도 볼 만합니다. 교실 앞에서도 전화로 아이들을 불러내어 데려갑니다. 제가 무슨 놀아주는 보모 같을 때가 있어요. 단 한 명의 부잣집 아이에게 방문지도를 했다던 태권도 사범의 씁쓸한 이야기는 더 이상 특정계층의 이야기가 아닌 듯해요.


반면에 학교에서 구제불능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은 마음 여는 과정이 조심스럽고 어려워서 그렇지 마음이 통하게 되면 놀라운 변화를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심리치료의 영역으로 이끌어 더욱 보호받아야 할 많은 아이들이 문제아 소리를 들으며 방치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는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문제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가정환경에 속상해하며 결국 마음의 병이 깊어만 가죠. 이렇게 마음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방법을 모르거나, 살 방법이 없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존재를 인정받으려고 다양한 방식으로 절규합니다. 이런 아이들을 사회나 학교 그리고 가정에선 함부로 말합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아이들에 대해 알아갈수록 제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저에게 결국 용기를 주고 웃게, 행복하게 해주는 게 또 그 아이들입니다.


얼마 전에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광명시 소하중학교 꾸러기들이 대표적인 경우예요. 아이들은 사랑해주는 대로 느낍니다. 저의 여러 가지 학창시절 꿈 중에 하나는 교육심리를 전공해서 학교에서 아이들과 얘기 나누는 교사가 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세 곳의 여대에만 그런 과정이 있어서 포기한 적이 있었는데 몸짓 프로그램을 통해 그때의 마음이 다시 새겨지곤 합니다.


지금 문득, 하운청 시인의 <부모와 자식>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부모와 자식 _하운청


자랄수록 멀어지는

자식을 보며

외로움이 무거운

발길을 옮겨

암자로 노스님을

찾아갔더니


은은한 검버섯

고운 손길로

녹차에 하얀 매화

띄워 주시며


사랑으로 묶는 것도

속박이어니

고치의 실을 풀 듯

풀어 주거라


남의 잠에 네 꿈을

담을 길 없고

남의 꿈을 네 잠에

그릴 수 없지


때론 가장 아끼는

다정다감이

정말 소중한 걸

잃게 하니라


잔잔한 볼우물

맑은 눈길로

다시 채운 찻잔을

건네주시며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 놓았고

아랫목에 이불도

깔아 뒀으니

그냥 푹 쉬고 또

쉬다가라네

Q 경기도 광명시에서 열어온 가족마임콘서트 <12월의 푸름 밤>이 올해 6회로 막을 내린다고 들었습니다. 재정적 어려움이 많으셨던 것인지요? 더불어, 이 시대에 ‘예술가로 (먹고)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A 재정적 어려움이 있지만 그게 <12월의 푸른 밤>이 막을 내린 첫 번째 이유는 아니에요. 명분과 당위가 없으면 등장부터 할 필요가 없는 게 연극적 본질입니다. 저 스스로 그런 점이 부족해진 게 더 큰 이유라고 봅니다. 무대는 혼자 열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동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구요. 이렇게 자기 존재가치 자체에 우선하는 저희들에게 ‘사는 것’과 ‘먹고사는 것’은 한없는 딜레마이기도 한데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무대에 서며 당연히 먹고 살아야겠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창작활동을 할 수는 없는 거죠. 


Q지금 몸담고 있는 ‘극단 달리는몸짓공장’을 소개해주세요. 

A 1995년에 고심 끝에 이름 지은 ‘몸짓굿studio’를 작년 말 역동적인 새로운 이름으로 바꾼 거예요. 그런데 좀 웃기는 게 공부하며 내적 성찰을 하자는 의미의 ‘몸짓굿studio’는 오히려 외향적이었고 상당히 활동이 많았어요. 지금은 말만 극단이지 1인 창업 같은 형태예요. 또한 역설적으로 가만히 머물며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으로 한동안 지낼 것 같습니다. ‘스스로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는가’를 두고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절실합니다. 마음으로 도와주세요. 반성 제대로 하라고. 



Q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그동안 내가 뭘 알고나 떠들었을까’ 이제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 어리석은 사람이 또 말 걸어준다고 수다를 한참 떨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끄럽지 않은 공연으로 무대에서 뵙고 싶습니다. 혹은 몸짓놀이에서 만나 봬도 좋겠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