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밖에서 만난 작가┃<무력한 조력자>를 우리말로 옮긴 채기화 교수


Q∥ 『무력한 조력자』는 어떻게 번역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번역작업을 할 때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A∥ 독일에서 10여 년 공부를 하면서 꼭 번역하고 싶다고 생각한 책들이 몇 권 있었어요. 그 중 두 권이 궁리에서 출간되었는데 한 권이 『애도』이고 다른 한 권이 이번에 번역한 『무력한 조력자』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조력자의 희생을 예찬하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남을 돕는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조력자의 내적 필연성을 다루었기 때문이었죠.


의사, 간호사, 교사, 사회복지사, 심리치료사와 같이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특히 자신의 내면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대하는 사람들을 이용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정신과 의사가 수련과정에서 교육분석을 받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섬세한 눈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이런 부분이 도외시될 뿐만 아니라, 내면이 폐허가 되어도 이상화된 조력자 상에 일방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고 있지요. 교육과정에서도 자기이해의 기회가 제공되기보다는 조력자 상에 맞는 투철한 초자아가 강조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이 이상화된 조력자 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균열을 일으켜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을 번역하는 데는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렸어요. 저자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하기도 했었고 전통적 정신분석가의 직업이력과 거리를 두고 대안적 활동을 모색해 왔지요. 그 분야에서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 과정에서 당연히 필요했을 새로운 용어와 번역하기 난감한 합성조어들을 많이 사용해서 그 부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이 어려웠어요.



Q‘조력자증후군(helper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조금 낯선데요. 주로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그들은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요?

A∥ '조력자 증후군'이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이유가 자신의 문제와 대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즉 이타주의를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일련의 특성을 일컫는 용어지요. 그들은 경직된 초자아를 가지고 있고, 그에 걸맞게 관심이나 도움에 대한 자신의 필요를 부정하고, 공격성을 직접 표출하는 것이 어렵고, 상호적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조력자는 교사처럼 대부분 자신보다 매우 어리거나, 의료인이나 사회복지사처럼 신체적 ․ 정서적 ․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게 되지요. 직업 활동을 통해 실제의 자신보다 매우 '강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지요. 이런 이성적이고 강한 역할이 조력자들의 내적 무력함을 가려주기 때문에 그들이 남을 돕는 일에 중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Q"나 스스로 조절해야지 당신들을 믿을 수 없어." "나는 당신을 도와주지만 나 자신은 도움이 필요없어요!" "내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않고 살죠." 조력자증후군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자주 하는데요, 그들은 왜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을 어렵고 힘들어하는지요?

A∥ 양육자와의 초기 관계에서부터 자신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조건부 수용을 받은 결과라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즉, 자기애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결과이지요. "네가 말을 잘 들으면, 착하게 행동하면 사랑해 주겠다."는 것은 아이의 전 존재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모습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자신의 존재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수정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가 부모와의 동일시, 초자아와의 동일시고요. 여러 학자들이 이런 결과를 다양한 용어로 설명하고 있어요.


돌봄과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는 억압된 채로 있고, 어른이 되어도 자신의 욕구 언저리로 다가가는 것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환기시키기 때문에 불안을 야기하지요. 따라서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간접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 계속 같은 양상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Q『무력한 조력자』는 독일에서 1977년에 출간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출간 당시 자칫하면 조력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처럼 독자들이 오해를 하거나, 조력자 당사자들이 반발을 하는 경우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A∥ 이 책은 출간 당시 한편으로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 신랄한 조롱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저자인 볼프강 슈미트바우어는 이 책을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알릴 수 있었지요. 지금도 저자의 이름에는 '조력자 증후군'이 같이 따라다닙니다. 이 책이 출간되던 1970년대는 그 안에서 특별한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정신병원을 비롯한 전면적 통제시설에 대한 신비화가 벗겨지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저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특별한 것인양 신비화․이상화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와의 벽을 높이 쌓아가던 조력자들의 내면에 현미경을 들이댄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지금 독일 사회에서는 방어로서의 이타주의 얘기를 할 때 '조력자들을 폄하한다.'거나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몰고 간다.'는 등의 초기에 보였던 반응은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독일사회가 개인 차원에서나 사회 차원에서 권위적인 존재의 외형을 허무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와의 대면작업을 부단히 강조하고 실행해온 결과이지요.



Q조력자증후군으로 힘들어하는 조력자들은 결국 외부의 도움도 받아야겠지만 본인 스스로도 어떻게 하면 지금의 상황을 호전시켜가며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타인도 도울 수 있을까요?

A∥ 정신분석의 가르침이 그렇듯이 해결의 실마리는 문제의 인식에 있지요. 문제에 대한 인식이 일거에 문제의 해결로 이끌지는 않지만, 적어도 모르는 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문제와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특히 조력자들은 직업활동과는 별개로 자신의 사생활에서 개인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감정의 상호교류가 가능한 사적 관계가 필요하지요. 안전한 대상을 상대로 자신의 욕구와 감정의 표현을 연습해볼 수 있게요. 그리고 이 관계 안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여도 된다는, 그래도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이 거듭되어야겠지요.



Q아직도 이런 심리적 문제들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독일사회와 한국사회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조력직종에 종사하지 않아도 지금 우리들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A∥ 이 책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역할이 고정되었다면, 특히 항상 주는 역할만 한다면 '착하니까'라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해서 성찰해 보기를 권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돕는 역할을 통해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기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그런 역할에 고정시킬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보살펴야 하고 사적인 관계에서는 퇴행이 가능해야 하기에, 주는 역할만을 하는 사람은 곧 활력을 잃고 관계 속에서 기쁨을 느끼기 어렵게 된다는 점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지요.



Q끝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A∥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멘토를 찾고 힐링을 외치는 이 시대의 문화현상과는 달리, 저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진정한 변화는 부단한 자기성찰과 자기격려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신이 그리워했던 것을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주어야겠지요. 자신의 결핍을 살피는 눈과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