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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밖에서 만난 작가┃<붕괴의 다섯 단계>를 우리말로 옮긴 홍기빈 역자 인터뷰


Q 지난해 <카를 마르크스>, <21세기 기본소득>, <도넛 경제학>, 그리고 궁리에서 펴낸 <붕괴의 다섯 단계>의 옮긴이로 독자들을 만났습니다. 얼마 전 <카를 마르크스>로 2018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번역서를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으신지요? 

A∥ 내가 번역하는 게 제일 좋겠다 싶은 책, 내가 읽고 싶은 책, 내가 쓰고 싶지만 쓸 능력이 모자란 책 등의 기준들이 있지요. 이것들 중 몇 개가 겹치면 제가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강의를 들으며 꼼꼼히 노트하고 싶은 책입니다. 번역하는 작업은 강의 노트 작성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강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최대한 그대로 살려내어 나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럴 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 가치가 있고 욕망이 생기는 책이라야 하지요. 안 그러면 번역은 지독하게 고역인 작업이 되고 맙니다.



Q<붕괴의 다섯 단계>, 이 책은 사회 붕괴 현상을 금융 붕괴에서 상업 붕괴, 정치 붕괴, 사회 붕괴, 문화 붕괴까지, 다섯 단계로 나눠 논의를 펼쳐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어떤 부분에서 이런 징후를 읽을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지난해 한국 GM이 군산공장을 폐쇄한 일이나 KT 아현지사 화재 사고로 인터넷, 이동전화, 카드결제 등이 마비된 일 등등도 이런 위기 중 하나이겠지요?

A∥ 사실 그러한 예는 대단히 많다고 봅니다. 이 책은 분석적인 목적이 있으므로 다섯 개의 단계를 나누어 이야기한 면이 있고요. 또 전면적인 붕괴라는 점에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다섯 개의 순서로 붕괴가 벌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즉 금융과 상업까지 붕괴하지만 국가, 사회, 문화가 버티고서 다시 문명을 회복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국가까지 붕괴하고 나면 사실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 빠지고 마지막 단계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제 견해로는 이 다섯 분야에서의 침식은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나 한국이나 자본 시장은 이미 산업을 조직하고 미래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은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자영업 붕괴와 상가 공실률 상승 등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국가 기구(특히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위기, 사회적 연대의 파괴, 가장 기초적인 문화적·윤리적 코드의 붕괴 등도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헬조선” 담론이 그러한 전면적인 사회 붕괴를 일컫는 말이 되겠죠.


저는 무슨 극적인 사태라는 식으로 붕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 다섯 분야 모두에서 한국 사회를 지금까지 지탱해왔던 구조가 모두 수명이 다했다는 증후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Q이 책의 소제목 중 하나가 “복지국가의 종언”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국가, 혹은 정치인에 대한 기대감이 낮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거대한 규모의 중앙국가보다는 작은 단위의 지방자치나 공동체를 선호하는 것을 보면,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인지, 국가와는 다른 자립적 섹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는데요. 물론 저자의 논점은 후자에 가깝겠지요?

A∥ 저자는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아나키즘의 입장에 서 있고요. 중앙집권적 국가의 전횡보다는 가족이나 친족과 같은 “자연스러운” 소단위로 조직되는 사회를 선호하고요. 붕괴의 상황에서도 후자가 더욱 생명력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자본주의 경제의 성공적인 작동을 전제로 그 잉여의 일부를 조세로 흡수하여 관료적 방식으로 재분배한다는 틀을 가지고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국가의 아래에 종속시키는 편향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2차 산업혁명 이후의 이른바 탈공업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형식으로서 도처에서 비판받아온 바 있습니다. 특히 금융과 상업이 붕괴의 위기에 있고 근대국가마저 위태로운 붕괴 상태에서 복지국가라는 전통적인 틀이 근본적인 해답이 되기 힘들다는 저자의 논리는 분명히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저는 “국가의 개조”라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국가가 사회 정책과 복지의 중요한 주체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그 방식은 사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녹아들고 또 사회에 종속되기도 하는 “파트너 국가”로 변화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사회 정책에서는 복지 서비스의 전달 체계부터 시작하여 지역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활성화하고 이를 국가 기관이 지지하는 방식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발전하는 것에는 무척 많은 어려움과 지루함이 있겠지만, 국가냐 (작은) 공동체냐라는 것으로 선택이 반드시 이분화될 이유는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Q저자는 가족과 같은 작은 단위의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안합니다. 물론 공동체라고 다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족이냐, 어떤 공동체이냐가 중요할 텐데요. 저자가 말하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인지 부연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부모가 돈만 벌어준다거나, 가족 구성원끼리 상호 소통이나 정서적 유대가 없다면? 저자도 그런 가족 공동체는 우려스럽게 바라볼 텐데요. 사실 한국 독자들 중에는 “가족” 하면 가족이기주의나 권위주의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A∥ 저자는 사회의 정치 경제 시스템이 글자 그대로 붕괴한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을 보장할 수 있는 생존을 위해서는 “자연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깔고 있으며 그 점에서 신뢰와 협동이 쉽게 이루어지고 생성될 수 있는 소규모의 혈연 공동체 등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어떤 형태의 공동체가 바람직한가라는 규범적 차원이 아니라, 생존을 가능케 할 만한 기능성을 가진 조직이 무엇이냐는 좀 더 절실한 차원이라고 할까요.


저는 그 신뢰와 협동이라는 말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이 “친족”이라는 집단은 정말로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한국 사회를 짓누르다시피 해온 단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지나치게 착취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뢰와 협동은커녕 질곡과 불화의 씨앗이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무엇하러 “친족”이라는 것에 연연하겠습니까? 따뜻하거나 정이 흐르지 않는다고 해도 좋습니다. 신뢰와 협동이 이루어지는 사회 단위라면 되겠지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뢰와 협동이 작동하는 크고 작은 사회 단위를 만들어내고 일구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옮긴이의 글에서 저자가 다루지 않는 붕괴를 하나 더 소개하셨습니다. 바로 “사회과학의 붕괴”인데요. 어떤 이유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짧게 언급해주신다면요?

A∥ 이 책에서 말하는 다섯 개의 층위는 모두 그 각각을 다루는 사회과학 분과가 있습니다. 이 각 분과가 정말 최소한의 “과학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정도 심각한 붕괴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만큼은 최소한 묘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실마리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금융 경제학의 무능력을 필두로, 자연 생태의 붕괴 와중에서도 전혀 변화가 없는 경제학, 국민국가의 위기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정치학, 사회 연대의 파괴를 오히려 부추기는 사회학, 인간의 근본적 가치와 형상을 되레 파괴하고 냉소하는 인류학과 인문학 등이 그 예입니다. 즉 사회과학의 붕괴는 이 다섯 개 층위 모두에서 나타나는 붕괴의 한 양상인 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성의 학계 내에 있는 사회과학 연구는 모두 현존질서status quo의 해설자이자 변호론자가 되어 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죠.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대학이라는 제도의 임무이니 거기에 순응하는 이들만이 대학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과학적”인 사회 연구의 부흥을 원하는 이라면 이러한 한심한 사회과학의 현재 상태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동료 학자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현실에 무관한 논문과 연구서들을 누에처럼 토해내는 일들은 그만해야 합니다. 대신 지금 우리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냉철하게 주시하고 이를 정말로 분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책에 대한 논의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겸허하게 참여하여 다른 목소리들을 널리 듣고 깊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이 전하는 낙관주의적 메시지가 있다. 설령 ‘붕괴’가 벌어진다고 해도 세상의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붕괴에는 여러 수준이 있으므로 각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용기와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더 많은 물질을 지배하여 무한히 잘 나가겠다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자기 스스로의 삶에 한계를 정하여 그 안에서 자족하면서 다른 이들과 또 자연과 화해하고 즐기고 사랑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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