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밖에서 만난 작가┃<시적 정의>를 우리말로 옮긴 박용준


Q독자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A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요즘 저는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가제) 원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2012년 궁리에서 출간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슬라보예 지젝 인터뷰』에 이은 "공동선 총서" 두 번째 권인데요, 독자 여러분께 조만간 선보일 수 있도록 한창 작업 중에 있습니다. “공동선 총서” 세 번째 권으로는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과의 인터뷰가 나올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Q최근, 철학자 알랭 바디우, 고은 시인, 이택광 교수 등이 대한문 쌍용차 농성장 앞에서 시민들과 시집을 읽는 침묵 시위 퍼포먼스를 펼쳤는데요. 퍼포먼스 제목이 “詩위, 시로 점령하라”였다고 하지요. 저는 퍼포먼스 장면을 보면서,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의 한 대목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인상 깊었습니다. 역자님은 왜, 지금,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두 달 전쯤 고은 선생님을 모시고 대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고은 선생님께서 문학의 정신 속에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 이상理想이 깃들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나네요.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충분히 어둡습니다.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도, 제주 강정마을도, 밀양 송전탑도, 모두 시대의 어둠들이지요. 『시적 정의』에서 누스바움이 인용한 월트 휘트먼의 시처럼, 문학은 결국 시대의 어둠을 감싸는 빛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그저 태양빛을 비추어 어둠을 밝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태양의 그 뜨거운 분노와 따사로운 껴안음, 나아가 고통의 저 깊은 심연까지 어루만지는 몸짓이 바로 시이자 문학이며, 이것이 곧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Q1995년작인 『시적 정의』를 어떻게 번역 소개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2009년에 하워드 진 선생님을 인터뷰하러 보스턴을 다녀왔습니다. 이 여정 중에 마사 누스바움 교수님도 만났습니다. 그때는 "정의"와 "희망"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만났던 분들이 공통적으로 정의와 희망에 대한 "문학의 공적인 기여"를 말씀해주셨더라고요. 그러던 중 『시적 정의』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고, 단번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디고 서원 허아람 대표님께서 적극적으로 권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스바움 교수 연구실에서

Q 누스바움은 그 명성에 비해 국내에 소개된 저작이 의외로 많지가 않습니다. 누스바움의 저작 중 『능력의 창조』가 올 하반기에 돌베개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들었고, 앞으로도 굵직한 저작들이 소개가 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누스바움의 책을 번역하면서, 감동하고 공감했던 대목이 있었다면 어떤 부분이었는지 들려주세요. 공감했던 책 속 구절이나, 누스바움의 철학사상을 소개해주신다면? A 누스바움의 다른 저서들이 국내에 소개된다니 기쁜 소식입니다. 누스바움의 초기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로 시작되었고, 보다 넓게는 그리스로마 사유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이 사유들 속에 담긴 인간의 가치와 사회 윤리의 새로운 구축을 위한 시도인 것이죠. 그러면서 누스바움의 사유는 자연스럽게 철학 및 문학의 사유가 어떻게 법과 사회 정의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게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시적 정의』의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배제된 자들과 멸시당하는 자들, 그리고 힘 있는 자들까지 그들의 삶의 상황과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공감을 통해 비천한 자들의 수모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 개입하기를 고집하는 것, 동등한 조건 속에서 오직 타인이 가질 수 있는 것들만 가지는 것, 배제된 자들의 고통과 핍박받는 자들의 위협에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것. … 오직 그러한 상상력만이 그들 삶의 사실들을 바로잡아줄 것이며, 그들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 속에서 개인의 존엄에 대한 훼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국 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정의에 도달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Q 『시적 정의』가 책(특히 시와 소설, 문학) 읽기의 공적 가치를 옹호하는 철학자의 이론서였다면, 최근에 궁리에서 펴낸 『인디고 서원에서 정의로운 책읽기』는 비유하자면 ‘『시적 정의』의 실천 편’이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이 책을 읽으며 진실과 정의에 눈떠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었는데요, 역자님 역시 인디고 서원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책 읽기를 해오셨지요. 독서가 역자님 인생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인디고 서원에서 정의로운 책읽기』야말로 누스바움이 말하는 문학적 책 읽기의 쓸모 있음과 가능성을 정확히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브라이언 파머 교수님이 언급하셨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지요. 저에게 책도 그렇습니다. 책을 통해 넓고 원대한 꿈을 품을 수 있었고, 보다 큰 세계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고요. 독서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고, 보다 나은 삶도 독서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Q내 인생의 책 혹은 내 인생의 작가를 꼽는다면?

A아,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작가와 책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그리고 저는 어떤 작가의 저서를 읽는 것 못지않게 그 작가의 삶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미셸 푸코의 유년 시절은 어땠는지, 파스칼 키냐르는 어떤 사랑을 꿈꿨는지, 시몬느 베이유는 왜 교수직을 버리고 공장 노동자가 되었는지, 롤랑 바르트는 왜 교통사고 후에 치료를 거부했는지 등 그들 사유를 형성했던 삶의 순간들을 보는 것을 좋아하죠.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에서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읽은 책과 작가들에게 전적으로 빚지고 있고, 그래서 그들이 형성해준 대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이죠. 아, 그리고 문학의 쓸모 있음과 관련하여 얼마 전에 번역된 사사키 아타루의 저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과 『이 치열한 무력을』 등도 분명 읽어볼 만한 책이라 생각이 듭니다.



Q<옮긴이의 말>에서, 하워드 진과 만났던 순간이 “내 삶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고백하셨는데요. 하워드 진의 어떤 점이 역자님을 매료시켰는지 궁금합니다.

A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워드 진 선생님은 거의 완벽하게 인간적이었어요. 멀리서 날아온 저희를 따뜻하게 환대해주셨고, 저희가 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여주셨죠. 대개는 서로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은 빨리 끝내고 바로 인터뷰를 시작하는데, 진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떻게 왔는지, 누구를 만났었는지, 또 앞으로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등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손자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 물어보는 할아버지 같았어요.^^ 그리고 인터뷰하는 내내 친절한 눈빛을 결코 잃지 않으셨죠. 사실 바로 그 눈빛이 결정적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아름다운 눈빛을 처음 보았거든요. 그리고 그토록 따뜻한 미소도!



Q영문 인문학 잡지 《INDIGO》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청(소)년들에게 혹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A이 질문은 사실, 저희가 만났던, 늘 그들의 삶을 존경했던 많은 선생님들께 드렸던 질문이기도 한데요. 재미있는 것은 항상 비슷한 답변을 들었다는 겁니다. 즉, 삶은 생각보다 짧고, 단 한 번뿐인 이 인생을 어찌 가치 없는 일에 쏟아버릴 수 있냐는 것이죠. 바우만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는 대부분 행복의 반대말을 불행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행복의 반대말은 의미없음meaninglessness이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행복을 달성하기란 너무 어려워질 테니까요.



Q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훌륭한 문학 작품은 정의로 나아가는 문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인용한 발터 벤야민의 이 말처럼, 『시적 정의』는 결국 훌륭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어떻게 사회 정의를 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책 읽기를 통한 문학적 상상력과 정의감 형성은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경험일 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어주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읽은 한 분 한 분이 함께 뜻을 품는다면 보다 나은 세상은 분명 가능할 것입니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꽃을 꺾을 수는 있지만 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꿈을 함께 공유해주십시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