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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밖에서 만난 작가┃<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를 펴낸 유윤한 작가 인터뷰


Q독자들에게 자기 소개와 인사 부탁드립니다.

A∥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에서 과학교육을 전공한 뒤, 10여 년 정도는 편집자로, 이후에는 쭉 번역가로 살아왔습니다. 제가 만난 저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서재에서 손수 커피를 타주신 서정주 시인과, 인지에 도장 찍는 작업을 아드님에게 시키신 이문열 작가입니다. 그리고 일본 문학 최고의 작가에게 주어지는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재일교포 유미리 작가도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나 미인이고 재능도 뛰어난데, 불행한 개인사를 지니고 있어 그런지 잠시나마 ‘삶에서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이처럼 문학을 사랑하는 편집자였지만, 정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자원 개발』입니다. 이 책은 교과서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국립 특수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전선(주로 탄광)에 뛰어들 학생들이 읽을 교과서였습니다. 전국에서 단 몇십 명이 볼 책이지만, 기획부터 인쇄까지 정성이 들어가는 과정은 똑같았지요. 제가 만드는 책을 읽고 직업을 가질 독자들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 책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보다 어린 독자들을 위해 『궁금했어 우주』와 『궁금했어 인공지능』이란 책을 직접 썼습니다. 이 두 책은 중국 수출이 결정되어 지금까지 외국 작가들의 책을 번역만 해온 저에겐 더 없이 큰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작가로서 국경을 넘어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 자체가 정말 큰 행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Q이번에 나온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제가 과학을 전공한 번역가이다 보니 출판사로부터 번역할 만한 도서를 추천해달라는 의뢰를 가끔 받습니다. 그래서 외국 사이트를 통해 시장 조사를 할 경우가 많은데, 미국 어린이 과학도서엔 STEM이란 큰 줄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줄기가 영어로 stem이네요.)


STEM은 ‘미국이 꿈꾸는 미래’라는 슬로건 아래 미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 분야를 합쳐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분야를 다룬 어린이용 STEM 도서에서 또 다른 한 줄기가 바로 여성 과학 기술자들의 삶에 대한 책들입니다. 여학생들이 어린 시절부터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고 과학기술계로 진출하도록 해주려는 책들이 부러울 정도로 많아 나와 있습니다. 이 책들에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부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거나 타인을 돌보는 일을 하라고 강요받았지만, 결국 노력하여 과학자로 열심히 활동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전 우선 <책읽는숲>이란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이런 책들을 소개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눈여겨본 궁리출판의 제안으로 이렇게 여성 과학자들의 인생 메시지를 담은 책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Q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부터 해커들을 연구하는 구글 보안 전문가 패리사 태브리즈까지 다양한 여성 과학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습니다. 이 25명을 선택한 기준이나 배경이 있다면요?


A∥크게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객관적 기준입니다. 미국 도서 시장에서 인정받으면서 잘 팔리는 STEM 도서들을 조사해 이에 포함된 여성 과학기술자들을 리스트로 작성해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주관적 기준입니다. 이건 저자인 저의 개인적 취향이 개입되는 부분인데요. 사회적 편견이나 성 역할의 고정관념에 얼마나 당당하게 맞서 과학자로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과학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Q여성 과학자 25명의 드라마틱한 삶을 써내려가면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가치관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들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A∥이 책에 실린 여성 과학자들 중에는 우젠슝처럼 딸을 위해 학교를 세울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부모를 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매리 킹슬리처럼 딸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집안일만 시키며, 학교에도 보내지 않은 부모를 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마음이었습니다. 대부분 여성들은 학교도 다닐 수 없던 시절에 이 책에 실린 여성 과학자들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 꿋꿋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남성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과학 분야에서 배척과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의지가 강했고 용기가 컸기 때문이겠지요.


보통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그때의 두려움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족쇄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비슷한 상황과 마주칠 때마다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주저앉게 됩니다. 이렇게 주저앉는 게 반복되다 보면, 결국 트라우마를 가져다 준 외부 환경만 탓하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패배자가 되기 쉽지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최초의 흑인 여성 우주비행사 메이 제머슨은 달랐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사는 시카고에 흑인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파견된 무장 군인들의 행진을 보고,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흑인으로서 언제든 무자비한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이 제머슨은 자신을 한없이 나약하게 만드는 그런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습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겪는 두려움 앞에 무릎 꿇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나도 저 군인들과 똑같은 미국의 구성원이야.”라고 속삭이며, 이후 다시는 두려움에 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큰 용기를 키웠습니다.


사실 그녀의 가슴 속엔 어려서부터 남다른 용기가 있었습니다. 어린 메이 제머슨이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선생님은 아마 그 꿈을 이루기 어려울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메이는 자라서 의사가 되었고, NASA의 우주비행사이자 연구원으로서 우주 공간에서 생명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되었습니다. 나중에 후배들에게 “다른 사람의 좁은 상상력 안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는 명언도 남겼지요.


이 책에 나오는 25명의 여성 과학자들이 모두 메이 제머슨처럼 용기있게 삶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인생을 바쳐 하고 싶은 일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한계를 넘어 자신만의 업적을 쌓는 기쁨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에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Q유 작가님은 이 책 속에서 어떤 인물에 가장 공감하며 집필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직장 내 차별을 딛고, NASA의 컴퓨터 과학자이자 시스템 공학자로 활발하게 활동한 마거릿 해밀턴입니다. 결혼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반 강제로 퇴사하는 선배들을 많이 보아왔고, 저 역시 출산 휴가를 한달만 쓰고 출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 육아를 책임지기 위해 프리랜서가 되었습니다.


마거릿 해밀턴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들은 하버드 로스쿨에 다니는 남자의 아내라면 집에서 다소곳이 차를 따라주는 주부를 떠올렸지요. 하지만 난 생각했어요. 내가 왜 집에서 차를 따르고 있어야 해? 나도 로스쿨에 다니면 변호사가 될 수 있는데.”


하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지는 않았던 마거릿은 MIT에서 적의 비행기를 감지하고, 날씨를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1900년대 중반은 여성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게 최고의 성공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마거릿은 시대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당시 남성들에게도 낯설었던 최첨단 분야에서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자신의 분야를 ‘소프트웨어 공학’이라 부르며 열심히 일했고, 이 말은 지금 하나의 학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마거릿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육아 문제였습니다. 동료 남성 직원들은 살림하고 아이를 키우는 누군가가 따로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없는 밤이나 주말에는 딸을 직장에 데려와 옆에 두고 일해야 했지요. 다른 남성 직원들보다 훨씬 불리한 환경이었지만, 열정이 남달랐고 프로그램의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하는 일에 뛰어났기 때문에 결국 팀장이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딸 로렌을 직장으로 데려와 밤늦게까지 일할 때였어요. 혼자 놀던 로렌이 모의 비행 장치의 ‘발사 전 프로그램’ 스위치를 누르자 시스템 전체가 오작동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마거릿은 실제 우주비행사들도 그런 실수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비행 소프트웨어에는 인간의 실수에 대비할 코드를 첨가했습니다. 그 유명한 닐 암스트롱이 자기를 뭘로 보고 그런 코드를 첨가하느냐고 노발대발 했지만, 그는 결국 마거릿 덕분에 인류 최초의 달 착륙자리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아폴로 11호의 비행사들이 달 착륙 직전에 실수로 엉뚱한 스위치를 눌러 경고시스템에 불이 들어오고 난리가 났지요. 하마터면 착륙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올 뻔했지만 , 마거릿이 추가한 실수 대비 프로그램이 작동해 덕분에 아폴로 11호는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사이에선 펀치카드에 코드를 새겨넣던 시절, 마거릿이 짠 버그 하나 없는 프로그램은 전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이것이 인간이 짠 것이 맞는가?’라고 감탄하는 글이 지금도 돌아다닙니다. 그녀가 짠 코드는 아폴로 착륙 후, 이것을 개량해 우주왕복 비행선에도 쓸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엄마로서 자녀교육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직업에 대한 치열한 자세로 어려움에 맞서는 태도,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개척하는 도전 정신, 그리고 결국은 이 모든 것을 가장 빛나게 해줄 최고의 실력을 갖추는 면에서 마거릿 해밀턴을 제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싶습니다.



Q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외에 미처 함께 다루지 못한 여성 과학자들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A∥현대 기술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 분야의 리사 수, ISS와 같은 대형 우주 플랫폼 설계자 에이프릴 에릭슨,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 카스9의 개발자인 제니퍼 다우드나처럼 차세대 과학 기술을 이끌어갈 여성 과학자들에게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 분들은 아직 활동 중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이야깃거리는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반도체와 유전자 편집은 기회가 된다면 꼭 다루어보고 싶은 분야입니다.



Q끝으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A∥이 책은 주로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 있을 학생들이 많이 읽을 것 같습니다. 여학생들이 주요 독자일 것 같지만, 성별을 떠나 모든 독자들에게 이 책에 담긴 메시지와 관련된 짧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얼마 전 수능 1타강사로 유명한 어떤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선생님은 고3 때 필통에 포크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졸리면 허벅지를 찌르는 용도로 말이지요.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고, 응급실에도 몇 번 실려갈 정도로 공부한 끝에 이분은 서울대에 진학했고, 지금은 고액의 소득을 올리는 대치동 명강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공부를 나처럼 하라고 강조하시더군요. 전 고3 때 매일밤 11시면 정확히 잔 끝에 이화여대에 갔고, 지금은 월소득이 매우 불규칙해 어느 달에는 한푼도 못버는 프리랜서입니다. 그래서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이 분이 무척 아프시고 사경을 헤맨 뒤 겨우 강단으로 복귀한 뒤부터는 학생들에게 절대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공부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전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왜 우리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입시만 보며 달려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야 좋은 직업을 가지고 성공하니까요? 그럼 좋은 직업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자본주의 사회에선 아무래도 고소득을 올려야 좋은 직업이겠지요. 고소득으로 쌓아올린 부를 SNS에 과시하며 사는 것이 어느새 이 시대의 행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 마지막에 제가 덧붙인 글에 등장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에서 모든 것을 누려본 끝에 그가 무엇을 강조했는지 궁금하시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세요. 저는 솔로몬 왕이 말하는 그런 기쁨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판을 내 기준으로 다시 짜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상이 짜놓은 대학입시, 수능, 의사, 변호사, 고소득 전문직, 공무원, 교사… 이런 판을 내다버리세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진작 이런 판을 내다버리고, 나를 중심으로 새롭게 판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모두가 한물간 판 속에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을 때, 이 책의 독자들만은 자신이 짠 새로운 판에서 주인공이 되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짠 판의 주인공이 되려면 평소 마음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좋은 책을 통해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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