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유리알 유희 : 토마스 크바스트호프와 함께


헤르만 헤세의 마지막 장편 소설 제목은 ‘유리알 유희’이다. ‘구슬치기’라고 부르면 더 가깝게 들릴까? 그러나 어릴 적 놀던 그 놀이는 아니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25세기 먼 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그 놀이는 그때까지 인류가 도달한 높은 수준의 음악과 학문을, 마치 화가가 팔레트의 물감을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해 화폭에 그림을 그리듯, 파이프오르간 연주자가 열손가락과 두 발을 사용해 장대한 음의 건축물을 쌓아 올리듯이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냥 놀자는 것으로 끝일까? 짐작하다시피 그 놀이는 ‘인생’을 함축한다. 삶의 규범을 만들고, 거기에 예술적인 유연성을 부여하고, 모진 운명을 개척하고, 후대를 교육하는 것이 놀이의 목적이다.


나는 사람들 앞에 서서 음악을 이야기할 때 종종 이것이 또 한 번의 ‘유리알 유희’라고 생각한다. 당장에 어디다 쓸 지식을 얻거나 사회를 움직일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저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으로 소리를 내보고 서로 다른 음높이의 건반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런 조화로운 작업 끝에 작은 감동이 솟아난다. 그런 감동이 모여 ‘우주의 화음’을 만드는 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떤 분은 내가 강의하는 세종예술아카데미나 무지크바움의 근사한 시청각 시설 때문에 감동 받는다고 말한다. 내가 소개한 자료를 사서 집에 가지고 가서 틀면 그럼 감흥이 없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매일 책상 앞에 앉아 평범한 스피커로 나오는 작은 소리에도 눈물콧물이 범벅이 되곤 한다. 내가 받은 감동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썩 쉽지만은 않다. 그동안 놀았던 유희의 과정을 함축해 정성껏 내놓았을 때 듣는 사람도 알게 모르게 내가 받았던 감동에 동화된다. 그것을 아무나 자기 집에 고스란히 옮겨놓을 수 있다면 난 그저 DVD 외판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만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시와 음악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시가 음악이고, 음악이 곧 시이거늘 이보다 좋은 주제는 없다 싶으면서도, 늘 쉬운 것을 전달하는 것이 더 어렵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들장미’, ‘마왕’, ‘송어’와 같은 슈베르트의 유명 가곡으로 시작해 구스타프 말러의 가곡들을 듣는 차례로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평범했다. 나열식이 아닌 구심점을 찾고 싶었다. 바리톤 토마스 크바스트호프(Thomas Quasthoff)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독일 태생의 성악가 크바스트호프 ⓒ konzerthaus

크바스트호프는 1959년 독일 태생의 성악가이다. 그가 태아일 때 엄마가 입덧 치료제로 먹은 약의 부작용 때문에 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자라지 않는 병에 걸렸다. 그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가장 원초적인 일을 스스로 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이지만 어려움을 듣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1925-2012) 이래 가장 성공한 독일 베이스바리톤 성악가로 우뚝 섰다. 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가운데 가장 즐겨듣는 베이스의 아리아로 감상회를 시작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2010년 실황은 피터 셀라스라는 무대감독이 연출한 것으로, <마태 수난곡>의 영상물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감동을 주었고, 베이스 크바스트호프의 노래는 그를 무대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지난 2012년에 그는 쉰 살을 막 넘긴 비교적 이른 나이이지만 오랜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무대에서는 노래하지 않겠다고 은퇴 선언했다. 고단했던 일생의 짐을 그만 내려놓겠다는 데에 누가 말릴 수 있으랴.


바흐의 칸타타 56번,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의 첫 번째 아리아

이어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피아노 반주한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보리수’를 틀었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 놓고서,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그 나무 밑...

굳이 위의 노랫말을 모르더라도 크바스트호프가 혈혈단신으로 무대 위에서 쏟아내는 낭만파 가객의 서정은 감상실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겨울나그네> 가운데 첫 곡 ‘안녕히’(Gute Nacht)

헌칠한 키의 미녀 성악가 안네 조피 폰 오터와 녹음한 슈베르트 가곡집 가운데서는 ‘음악에’(An die Musik)와 ‘그대는 안식’(Du bist die Ruh)을 골랐다. 음악을 듣기에 앞서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키 작은 프리데만씨』의 구절을 소개했다. 주인공 프리데만은 어려서 술에 취한 보모가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성장 장애가 온 인물로, 왜소하고 우스꽝스러운 몰골에 비해 예술, 특히 음악을 사랑하는 신사이다. 나는 크바스트호프가 당연히 이 소설을 봤을 것이고, 누구보다 뼈저리게 가슴 아팠을 것이라 생각했다. 프리데만은 도시에 새로 부임해온 고관의 매혹적인 아내 게르다를 보고는 심장이 멎을 만큼 격정에 휩싸인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충돌, 자신과 그녀의 말할 수 없이 먼 거리감에 그만 그는 혼절할 지경이다. 하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이 울려 퍼지는 극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 마음이 서글퍼진 어두운 때, 고운 가락 고요히 들으면서, 언제나 즐거운 맘 솟아나, 내 방황하는 맘 사라진다.

고등학교 시절 배운 슈베르트의 노래 ‘음악에’의 가사가 정말이지 공감가면서도 역설적인 순간이다. 이제 감상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크바스트호프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물론 마법에 초대한 나도 마찬가지다. 역시 슈베르트의 연가곡 <백조의 노래>(Schwanengesang)의 마지막 앙코르인 ‘비둘기 우편’(Die Taubenpost)이 이어진다. 연인에게 전갈하는 비둘기 우편, 그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답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할 것 없이 비둘기는 충실하게 임무를 다한다. 이 어찌 충실한 벗이 아닐까! 그 가운데 한 소절은 어릴 때 라디오로 듣던 연속극 주제가와 딱 맞아 떨어진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나눕시다. 다정하게 일년 삼백육십오일.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어도, 우리 집은 언제나 웃으며 산다.

마침 라디오 연속극 ‘즐거운 우리집’을 기억하는 분이 내 노래에 호응해 주셨다. 이제 슈만의 가곡 ‘헌정’을 듣는 것으로 예술가곡을 마무리했다.

그대는 나의 영혼, 그대는 나의 마음, 그대는 나의 기쁨, 그대는 나의 슬픔... (중략) 나보다 나은 나!

오페라도 듣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하는 연기가 버거운 그이기에 오페라가 많지는 않지만 음반으로는 꽤 여럿을 들을 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만년의 걸작 <말없는 여인>은 ‘이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베이스의 아리아로 끝난다. 말 그대로 “이 얼마나 웃기는 자화자찬”인가! 작곡가가 자기 작품을, 성악가가 자기 노래에 감탄하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그럴 만하다는 데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무대. 크바스트호프는 뜻밖에 재즈 앨범을 두 개나 냈다. 독일 정통 성악곡들로 만났던 그를 브로드웨이나 뉴올리언스의 선술집에서 만나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맹인 팝스타 스티비 원더의 ‘You and I’만큼 가슴을 때리는 순간이 또 있을까! “We can conquer the world in love you and I”라는 절규를 누구에게나 모국어로 들리게 하는 힘, 토마스 크바스트호프이기에 가능했다.

크바스토프의 <재즈 앨범> 가운데



시와 음악의 친화력, 아니 일체감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랴. 멋지게 유희했으니 그것이면 되었다.



ⓒ 정준호. 2013. 0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