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200주년을 맞은 베르디: 말이 먼저인가, 음악이 먼저인가



오페라 사상 최고의 인기작 <라 트라비아타>




오페라가 16세기 말 피렌체에서 처음 탄생했을 때는 작품을 이루는 여러 예술 장르의 지분이 균등했다. 음악을 맡은 작곡가와 대본을 쓴 작가, 무대를 꾸미는 미술가가 의견을 나누었고 동료를 존중했다. 오비디우스와 같은 고대 작가에 이어 토르콰토 타소와 같은 현대 시인들의 작품은 점차 전형이 되어 갔다. 여러 작곡가가 하나의 성공한 대본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오페라가 궁정 밖으로 나와 점차 규모가 큰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흥행을 염두에 두게 된다. 메타스타시오, 보마르셰, 카를로 고치, 카를로 골도니와 같은 18세기 극작가들은 당대를 풍미했다. 이들의 성공작이 반복해 오페라 무대에 오르면서 청중은 같은 이야기라도 작곡가의 역량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몸으로 느끼게 된다.


19세기에 접어들면 오페라를 작곡가가 주도하기 시작한다. 출판 시장의 성장으로 오페라의 소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이탈리아와 독일에 르네상스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가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당대 스코틀랜드의 작가 월터 스콧의 역사 소설과 프리드리히 실러, 빅토르 위고가 그린, 민중이 주인 되는 이상적인 사회 연극은 전 유럽으로 빠르게 퍼졌다. 신화와 성서, 영웅 전설이 차지했던 자리를 역사적 리얼리즘이 빠르게 대체했다.


주세페 베르디(1813-1901)가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점차 민족 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작품의 대본을 직접 창작한 동갑나기 바그너와 달리 베르디는 매우 많은 원작자의 작품을 여러 대본작가와 공동으로 선택해 음악을 붙였다. 그 가운데 언급할 만한 작가로는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프리드리히 실러,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있다.


베르디가 위고의 희곡에 붙인 <리골레토> 가운데 ‘여자의 마음’




1830년에 나온 위고(1802-1885)의 희곡 『에르나니』는 프랑스 문단에 낭만주의 물결을 일으킨 희곡으로 유명했다. 역시 그 해에 나온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와 더불어 예술의 혁명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1844년, 막 서른을 넘긴 베르디는 이탈리아에 그 열기를 옮겨 붙였다. 정치적인 긴장감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나로 묶은 오페라 <에르나니>의 성공은 이후 베르디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되었다. 이제 베르디는 매년 하나 이상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유명 작곡가가 되었고, 1851년에 다시 한 번 위고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리골레토>는 베르디에게 경제적인 부를 보장해 주었고, 나라밖에서도 유명하게 만들었다.


위고와 더불어 프랑스 문단의 주인공이었던 뒤마(아들, 1824-1895)가 같은 시기 베르디의 눈에 들어왔다. 『동백 아가씨』를 원작으로 한 <라 트라비아타>(1853)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기억되며 전 세계의 오페라 극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위고와 뒤마 못지않게 젊은 베르디가 가장 관심을 가진 작가는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였다. 괴테와 함께 ‘바이마르의 쌍둥이 별’로 불리던 실러는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서 사회를 개혁하려는 뜻을 폈다는 점에서 베르디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1845년 <조반나 다르코>(『오를레앙의 처녀』)를 시작으로 1847년 <이 마스나디에리>(『도적떼』), 1849년 <루이자 밀러>(『간계와 사랑』)가 중기로 가는 베르디의 밑거름이 되었고, 1867년에 나온 <돈 카를로스>는 힘 있는 완숙기에서도 특히 우뚝 선 작품이 되었다.



베르디의 오페라로 거듭난 실러의 원작들

셰익스피어(1564-1616) 또한 베르디의 일생에 걸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1847년 <맥베스>가 오페라가 되었다. 40년 뒤 또 다른 비극 <오텔로>가 바그너에게 받은 영향을 보여주며 무대에 올랐다. 여든 살이 되던 1893년에는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과 『헨리 5세』에 등장하는 희극적인 인물을 가지고 <팔스타프>라는 작품을 내놓으며 음악과 극장을 하나로 묶는 일생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뛰어난 대본이 베르디의 음악과 만났을 때 가져온 효과는 말할 수 없이 컸다. 베르디는 무엇보다도 힘찬 장면을 원했다. 기교 위주의 벨칸토 오페라가 영웅적인 웅변에 자리를 내주게 만든 중심에 베르디가 있었다. 시대의 파고에 맞서는 에르나니의 용기와 주인이 벌이는 난봉 행각의 희생양이 되는 비뚤어진 리골레토의 반전은 베르디의 오페라를 통해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주인공인 루이자 밀러와 아버지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전제 왕권과 교회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미는 돈 카를로스 왕자의 광기는 객석의 머리를 쭈뼛 서게 만들었다. 운명의 노예가 되어 파멸로 치닫는 맥베스와 오텔로, 관객의 놀림감을 자초하는 우스꽝스러운 팔스타프의 모습 위에는 어김없이 그 모든 것을 음악으로 제어하는 꼭두각시 놀이꾼 베르디가 자리했다.


그러나 베르디가 성공하는 데 오늘날 알려진 작가나 작품의 권위가 필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문호 바이런(1788-1824)의 시에 붙인 <두 사람의 포스카리>와 <해적>은 베르디에게 큰 성공을 안기지 못했다. 지금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외젠 스크리브와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스의 희곡에 붙인 오페라는 앞서 언급한 작품들 못지않은 걸작의 토대가 되었다.


스크리브의 대본에 따른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와 <가면무도회>는 정치적인 소재와 비극적인 사랑을 선 굵은 음악으로 엮어 까다로운 이탈리아 청중을 매료시켰다. 스페인 작가 구티에레스는 스크리브나 뒤마의 작품을 번역해 자기 나라에 소개하는 데서 이력을 시작했다. 그는 첫 작품인 『음유시인』으로 큰 성공을 보았고, 베르디는 <일 트로바토레>를 통해 그 주인공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형상화 하는 데 성공했다. 베르디가 구티에레스의 원작에 붙인 다음 작품 <시몬 보카네그라> 또한 깊이 있는 음악 덕에 연극에 생명력을 더했다.


한 마디로 베르디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강렬한 대본의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 극장인이었다. 청중을 흥분하게 하는 요소가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그 즉시 음악의 소재가 되었다. 문학적인 재능이 떨어지는 작가의 통속적인 소재도 일단 베르디의 손에 들어가면 음악의 힘을 입어 더욱 강력한 예술로 탈바꿈했다. 연극이었을 때 거둔 작은 성공도 오페라가 되면서 엄청난 파급 효과를 불러왔다.

<일트로바토레>의 상연 장면으로 시작하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센소>




베르디가 이토록 천부적인 눈썰미로 연극의 장면을 솎아내는 데는 그와 찰떡궁합을 이뤘던 대본작가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일트로바토레>를 비롯한 중기 작품에서 손을 잡은 살바토레 카마라노,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 등을 이탈리아어로 다듬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 마지막 셰익스피어의 두 작품을 걸러낸 아리고 보이토는 베르디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보이지 않는 공헌자들이었다.


베르디는 이들과 함께 원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추려내 나열했다. 도저히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중요한 장면들도 작품의 흐름을 위해 과감하게 도려냈고, 장면의 순서도 필요하다면 서슴지 않고 뒤바꿨다. 이들의 치밀한 계산에 베르디의 강렬한 음악이 더해져 삭제된 부분을 멋지게 보완했고, 원작에는 없던 긴장감을 불러왔다.


베르디는 르네상스 이탈리아가 만든 가장 멋진 종합 예술인 오페라를 극장에서 가능한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그로 말미암아 푸치니와 같은 후배들이 민초들의 삶을 현미경과 같이 들여다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삶과 예술을 하나로 묶는 베르디의 방식이 20세기 들어 루키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페데리코 펠리니와 같은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하다.



ⓒ 정준호. 2013. 05.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