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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파기를 시작하다 – 건축 일기 12


흙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절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뭉치고 모이면 무언가 일을 도모하려고 한다. 높이를 만나면 무너지려고 하고 비를 만나면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넉넉해지려고 한다. 바닷물에 조류가 있듯 흙에도 큰 흐름이 있다. 그것이 압력이고 힘이다. 이류(泥流, mudflow)와 토석류(土石流, earthflow)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이번 공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가 땅도 바다처럼 출렁이고, 움직이고, 이동하고, 거대하게 변화한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우리는 배 위에서만 멀미를 느끼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제 발밑의 땅들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순간이 왔다.


드디어 흙 파기가 시작되었다. 가만히 있는 흙을 들쑤시기가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큰 포클레인과 작은 포클레인 그리고 흙을 실어 나를 트럭이 조를 이루어 협업하는 작업이었다. 먼저 한번 뜨면 한 리어카는 충분히 담을 만큼의 흙을 떠서 트럭에 실었다. 어느 새 움푹 파인 땅. 공간이 확보되자 작은 포클레인이 밑으로 내려갔다. 작은 포클레인이 조심스럽게 뒷정리를 했다.


그저께 지상에서 3미터 더 박아놓은 파일이 드러났다. 그사이 흙속에서 숙성이라도 되었는지 파일은 옴팍 늙어보였다. 실제 무슨 부식이야 있었겠냐만 흙이 덕지덕지 묻은 탓인 듯했다. 작은 포클레인은 파일 사이를 재재발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조심스레 긁어냈다.


공사 현장이라고 중장비가 눈에 띄지만 그래도 마무리를 담당하는 것은 삽이었다. 큰일을 푹푹 하는 건 포클레인이었지만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삽이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큰 포클레인이 푹푹 흙을 뜨면 작은 포클레인이 파일 사이를 조심스레 다니면서 다지고 정리했다. 그리고 그 최종 마무리는 삽이 했다. 삽, 참 쓸모가 많은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한켠에서는 목재가 쌓여 있었다. 얼핏 보면 색동옷을 연상케하는 고운 목재들. 즉석에서 간이 제재소가 설치되어 송판을 간격에 맞게 잘랐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빔 사이의 간격에 맞춰 나무판때기를 끼워넣었다. 흙이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땅을 파는 것과 동시에 벽이 생겨나고 그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토류판이 또한 동시에 완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H빔의 홈에 곧게 자른 송판을 차례로 끼워나가는 것을 보니 꼭 거대한 쌀뒤주를 연상케 했다. 더구나 작은 포클레인으로 흙을 떠서 나무 뒤의 빈 공간을 메우면서 다지는 것을 보니 빈 곳간에 쌀을 가득 채우는 것과 어찌 그리 같은가.


포클레인 아래에 큰 트럭이 공손하게 등을 들이대면 몇 번의 작업으로 트럭에 흙이 가득 찼다. 이 흙은 어디에 버릴까. 현장소장에게 물어보았더니 이곳에서 가까운 적치장으로 옮긴다고 했다. 궁리의 땅에서 나오는 저 흙은 궁리 것이지만 돈을 받고 팔 자원이 아니었다. 석유나 석탄이라면 모를까, 어디에서도 채취 가능한 너무나 흔한 지하자원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들었던 싱거운 농담 중에는 목욕탕과 관련한 것이 많은데 이런 것도 있었다. 내 것 주고 돈도 주는 게 뭘까. 답은 때다. 모처럼 작정하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살갗이 벗겨지도록 때를 밀던 시절. 그때 누가 지은 유치한 우스개였다. 따지고 보면 오늘 트럭에 실려가는 저것도 우리 영역에서 나오는 지하자원이다. 저 심학산의 아들처럼 많은 양의 흙을 정제한다면 개구리 발톱만 한 구리나 금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곳이 매립층임을 감안하면 그나마도 그리 기대할 것도 못 되겠다. 어쨌든 궁리는 궁리의 것을 돈 주고 팔고서 저 튼튼한 지하의 허공을 산 셈이었다!


터파기를 하는 동안 행운이라면 행운이 찾아왔다. 지하 20미터의 암반을 찾을 때는 물이 나와서 고생을 했다. 그런데 작업이 이루어지는 지하 3미터의 공간에서는 물이 흔적조차 없었다. 깨끗했다. 만약 저 깊이에서도 물이 나온다면 엄청나게 고생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공사장의 안전에도 크게 위해가 될 만한 요소였다.


흙을 파자 지층의 구조가 자연스레 드러났다. 지질주상서에 나타난 대로 이 지역은 층이 있고 그 위를 매립하여 만든 부지이다. 우리 땅은 3미터까지는 매립층으로 갈색으로 자갈이 섞인 실트질의 모래로 구성되어 있다. 그 아래 6미터까지는 퇴적층으로 회색이거나 암회색의 실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은 실트질의 모래로 구성되어 있다. 시트(SILT)란 모래보다 가늘고 점토보다는 거친 입자의 퇴적토를 말한다.


먹음직스러운 살코기처럼 붉게 드러난 흙. 잘 구운 삼겹살은 저리 가라 할 만큼 곱고 고운 흙. 두꺼운 지층 사이로 그간 간직한 따뜻한 기운이 찬 공기를 만나 흰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나무기둥의 나이테처럼 눈에 띄게 층이 도드라지는 흙벽에는 그간 이 지역에 일어난 역사가 정직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앞으로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을 숨기지 않으면서 시공사 사장님이 한 마디 툭 던졌다.


“햐아, 땅이 참 곱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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