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북으로 방향을 잡아 달린다. 한강과 더욱 친근하게 접촉하는 난지도 지날 무렵 길바닥에 일산, 파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흰 페인트 글자를 문지르며 속력을 높일 때, 파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간 파주의 ‘파(坡)’는 나에게 너무나 강력한 한자였다. 파격, 파경, 파계, 파문, 파국, 파열, 파산, 파쇄, 돌파, 파락호, 대파, 설파......그리고 최불암의 독특한 웃음인 파하하하까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한 세계를 닫고 새 세계를 열어젖히는 파천황의 변화. 이런 ‘파’의 파열음은 대쪽같은 냉정함을 불러오는 정신의 경사면이었다.
몇 해 전, 오래 몸 담았던 인왕산 아래에서 파주출판단지로 어렵사리 짐을 옮길 때, 이제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하게 될 고장의 이름에 대해 오래 궁리해 보았다. 그리하여 어느 고사성어의 준말이라도 되는 양 ‘파주’에서의 살림살이를 시작하면서 사뭇 이런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破釜沈舟(파부침주)*의 심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심학산 자락의 새로운 공간이 뜻밖의 궁리를 물어다 줄 기대를 조금은 하고 싶다.
그랬던 파주였다. 그냥 갈라치는 파도의 한 물결처럼 노년을 의탁하게 된 고장에서 무덤덤한 날을 보내는 일상이었다. 그제 옥편을 뒤지다가 파주와 관련하여 기존의 내 상식이 일거에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파주의 파(坡)는 깨거나, 깨지거나, 깨뜨리거나, 가르거나, 나누거나, 흩트리거나, 파괴하거나, 찢거나........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닌가. 파주의 ‘파’는 고개, 언덕, 비탈, 둔덕, 둑, 제방을 뜻하는 글자였다. 이렇게 얌전한 의미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 이제 심학산 오를 때마다 심학은 물론 파주에 대해서도 곰곰 궁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이면 날아드는 새들의 둥지처럼, 피안으로 건너기 전 잠시 대기하는 이승의 대합실 같은 곳.........................파주.
*破釜沈舟.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 살아 돌아오기를 기약하지 않고 결사적 각오로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
(2022.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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