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 대한 명상 – 건축 일기 11


1.


인왕산 허리쯤에 있던 옥인아파트가 지금 해체 중이다. 그 작업 현장에서 일하는 포클레인 기사 이氏는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리는 데 선수다. 자신의 조종대로 무쇠팔이 대신 나서서 목표 지점을 강타하면 순식간에 건물은 허무히 주저앉고 만다. 검은 선글라스의 이氏는 자신의 의지대로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벽돌과 옥상과 계단의 부스러기에 부르르 온몸의 쾌감을 느낀다.


그는 마음껏 기분을 풀고 운전석에서 내려온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그가 딛는 곳은 어디인가.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는 그를 받아주는 것은 누구인가. 땅이다. 그는 땅에 서서 자신이 박살낸 건물의 잔해와 파편들을 가소로운 듯 바라본다. 이제는 위치에너지를 잃어버리고 힘없이 쓰러져 있는 벽돌덩어리들과 각종 쇠부스러기들.


지금 그 광경을, 온갖 쓰레기들과 이氏를 멀리서 보면서 인왕산을 오르는 김氏는 생각이 좀 다르다. 그는 은퇴한 출판업자이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가장 힘이 센 것은 결국 흙이란 생각이 든다. 저 포클레인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그도 흙 위에 서 있는 것 아닌가. 언젠간 이 씨나 김氏도 모두 흙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김氏는 그제 아침 신문에서 읽은, 4대강 속도전으로 파낸 준설토가 남산의 11배만큼이나 된다고 하는 뉴스를 떠올린다. 경북의 칠곡보 건설 구간에서 파낸 것만으로도 높이 10미터 너비 8미터의 거대한 흙더미를 대구에서 경주까지 쌓을 수 있는 양이란다. 이만한 흙이라면 서울을 다 매립하고도 남지 않을까.


그리고 김수영의 시 한 구절도 떠올린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굳이 따지자면 거대한 뿌리를 받아주는 것도 거대한 땅이 아닌가. 오늘따라 김氏는 새삼 느낀다. 각종 나무를 끌어안고 기차바위와 치마바위를 짊어지고 군부대와 경찰대대를 주둔시키는 인왕산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김氏는 인왕산 중턱에서 흙 한 줌을 쥐었다가 휙 아래로 던진다. 그리고 포클레인 기사 이氏한테 전하고 싶다. 손 안의 흙 한 줌이야 부드럽기 한량없을 테지만 더 크게 눈을 떠보라고. 흙의 단단함, 거대함과 신성함에 대해서도 한번쯤 살펴보면서 작업하라고.


---- 졸저, <신인왕제색도> 중에서 인용.




2.


지금부터 15여 년 전. 궁리가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봉천동 산 1516번지의 비탈이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낙성대 근처로 가다가 연립주택 공사장을 지나게 되었다. 소위 주택업자가 지은 낡은 집을 허물고 신축하는 곳에 미니 포클레인이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공사장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지하에서 파헤쳐진 벌건 흙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건만 그날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무거운 것이 흙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세상의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하여간 그 모든 것이 땅위에 놓여 있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공중의 새도 그림자로 땅을 딛지 못한다면 날 수 없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몰려들었다. 흙 한줌이야 가볍게 손에 쥔 뒤 솔솔솔 바람에 날려 보낼 수 있지만 저 무거운 흙덩이를 누가 감히 대적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흙, 생각해보면 참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지만 흙, 다시 궁리해보면 참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땅을 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자라면 모를까, 땅에 기반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아닐까.


이제까지 하루도 쉼 없이 궁리 사옥 현장에서 착착착 여러 공정이 진행되었다. 그간 찬바람 부는 곳에서 이제껏 호호호 손 불어가면서 한 작업이란 결국 흙에 측량을 하고, 표시를 하고, 말뚝을 박고, 구멍을 내고, 구획을 정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흙을 대상으로, 흙과 주고받은 작용과 반작용이었다. 달리 말하면 흙의 마음을 떠보고, 흙에 슬쩍 걸어본 연애수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제부터는 본격 흙을 파야 한다. 그 준비작업의 첫 번째로 오늘의 작업은 H빔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지하에 들어설 주차장과 창고의 공간만큼 흙을 들어내야 하는데 무작정 흙을 긁어낼 수는 없다. 혹여 그 흙벽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서 수직의 토류판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 작업은 파일을 박을 때와 공법이 비슷했다. 드릴로 구멍을 뚫은 뒤 크레인이 빔을 끌어올려 정확이 집어넣는 것이다. 파일처럼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경계선을 따라 3미터 간격으로 빔을 설치했다.


작업장 한켠에 그제까지 파일의 대가리를 사정없이 박을 때 활약했던 오그드릴이 이제 임무를 끝내고 분해되어 있었다. 포클레인에 매달려 있을 땐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으나 그것은 여러 토막으로 나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육각형의 벤젠고리 같은 암모양과 수모양으로 꽉 맞물리도록 되어 있는 구조였다. 어느 화학자는 꿈에서 뱀이 자신의 머리로 꼬리를 무는 모양을 본 뒤 이 벤젠의 화학구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사소한 구조가 이 육중한 쇠덩어리를 감쪽같이 연결시키고, 또한 동력도 작은 누수도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공사현장 또한 착착 맞물려 돌아간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동원된 중장비도 여러 종류였다. 참여한 인원도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복장도 신발도 얼굴은 각각 다 달랐지만 모두들 한결같이 비슷한 안전모를 쓰고 있었다. 각자 소속된 회사의 로고가 닳아서 희미해진 안전모였다. 각각의 소임에 따라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공사 현장. 눈에 보이지 않는 벤젠구조 같은 정밀한 구조가 작동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머리는 꼬리를 물고, 또 꼬리는 머리를 무는 행렬이 하나의 건물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인 것! 이제 내일이면 흙을 판다. 소위 말하는 첫 삽을 진짜로 뜨는 것이다.


사족. 위의 인용한 글은 인왕산을 한참 오르내릴 때 <흙 한 줌>이란 제목으로 2010. 5. 12일에 쓴 것이다. 글에 등장하는 포클레인 기사 이氏의 행방은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신문에 가끔 근황을 알리기도 하는 것 같더라. 다만 은퇴한 출판업자 김氏는 아직도 연락이 된다. 그는 지금 파주에서 집짓기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가끔 현장에서 ‘흙 한 줌’을 손에 쥐고 한숨에 날려보기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