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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바닥에 벌렁 드러눕다 – 건축 일기 25


계단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납작할까. 계단이 없다면 2층 이상도 없을 것이다. 공간을 분할해서 복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 그건 계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계단이 아니라면 그저 천정이 높은 단층이나 지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의 건축이 나름의 복잡성과 고유한 특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복도 뒤로 돌아서 물러나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힘이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뒷줄을 묵묵히 담당하는 계단의 덕분으로 건물은 2층 이상으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카오스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건축 현장에서 어느 방, 어느 공간, 어느 기둥인지를 잘 분간을 못하겠더라. 그중에서 그래도 인공의 축조물이란 느낌을 가장 강하게 주는 것이 계단이었다. 계단은 미로 같은 지하를 향해 하나가 들어섰고 현관에 해당하는 곳에 작게 들어설 예정이다.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고 마구 무질서한 현장에서 그마나 나의 눈에 띈 것이다. 아직 내부는 밀림처럼 빽빽해서 분간이 잘 가지를 않았으나, 그중에 눈에 들어오는 건 그나마 계단이었던 것이다.


수직의 벽이 모두 세워지고 두툼하게 수평의 판들이 기중기에 들려 현장으로 들어갔다. 1층의 뚜껑이자, 2층의 바닥들이다. 철근을 정밀하게 세우고 그 사이로 전기와 통신이 흐를 관이 삽입되었다. 보온을 위한 스티로폼도 깔렸다. 그리고 다시 합판을 깔고 작은 철근을 대었다. 요소요소에 구멍을 뚫고 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긴 철근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고정핀을 두었는데 그 모양이 꼭 에펠탑 같았다. 그 옆으로 나비 같은 매듭이 꼭꼭 묶였다.



그런 복잡한 공정을 거쳐서 철근 배근 작업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다시 1층 벽과 2층 바닥을 형성하기 위한 콘크리트 작업!


콘크리트 작업을 하는 중에 작은 사고가 났다. 현관 쪽의 벽에 콘크리트를 투하하는 중 거푸집의 이음새가 떨어지면서 바깥으로 푹 밀려나온 것이다. 콘크리트가 물에 녹아 물렁물렁하고 흐물흐물할 줄만 알았는데 뭉치고 쌓이니 강력한 힘과 압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를 맨날 이렇게 취급하지 말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 힘은 하도 강력해서 받침대로 세워둔 철근봉을 뚝 휘게 만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울타리를 뛰쳐나온 황소처럼 아예 바깥으로 콘크리트가 터져 나오는 수도 있다 한다. 현장에서 작업하는 분들이 급히 수습을 해서 위기를 넘겼다.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심기일전하는 기분으로 더욱 조심스럽게 작업을 해서 무사히 2층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밤이 왔다.


다음날 오후 늦게 현장으로 갔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은 콘크리트 양생기간이라 현장에서 작업은 없었다. 오늘 퇴근 무렵에 온 것은 까닭이 있다. 그간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한낮에만 현장을 보았다. 오늘은 노을 속에서, 저무는 저녁 가운데에 서서 현장을 보고 싶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건물은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 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하층일 때는 몰랐는데 거푸집으로 휘돌아 2층으로 올라간 건물은 위용이 제법 대단했다. 더구나 3층으로 연결될 철근과 지지대는 2층 이상으로 뻗어 있어 더욱 그러했다. 간단한 몸집이 아니라 떨어지면 다칠 수도 있는 높이를 보유한 건물이라는 실감이 새삼 들었다.


가까이 가니 거푸집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어제는 콘크리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있었다. 망치 소리 뚝 끊긴 적막한 곳에서 콘크리트가 굳어지는 소리, 그것은 도가니에서 술 익는 소리라면 조금 과장이겠다. 그래도 나에겐 부글부글 막걸리가 발효하는 소리만큼이나 달콤한 음향으로 귀를 파고들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 그리고 현관의 짧은 계단. 그것을 지금 볼 수는 없었다. 대신 외부에 임시 가설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공사 중일 때도 몇 번 올라와 보기는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미 콘크리트는 내 몸뚱어리 하나는 받아낼 만큼 충분히 굳어 있었다.


삐쭉하게 뻗은 철근 사이로 조심해서 2층 바닥으로 내려서는 순간, 몇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이곳은 궁리 사무실이 들어서는 공간이다. 공간을 바꾸면 생각도 바뀌고, 그래서 새 공간에서 궁리의 세계도 바뀔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파주로 사무실을 옮긴다. 그런 희망이 이제 실제로 머지않아 일어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낮이 밤으로 교체되는 오묘한 저녁의 시간. 노을이 지고, 이웃한 헤르만 하우스에서도 방마다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뜨겁던 해도 서쪽 하늘에서 작은 등불이 되어 달려 있었다. 2층이라지만 아직 벽이 없고 더구나 지붕이 없어 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곳은 나에겐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하기 이를 데 없는 방이었다. 도면으로 볼 때는 실감이 오지 않았는데 실제로 바닥을 거닐어 보니 예상보다 넓은 면적이었다. 몇 바퀴 거닐다가 서슴없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때, 조금 전, 그러니까, 삐쭉하게 뻗은 철근 사이로 조심해서 2층 바닥으로 내려서는 순간에 떠올랐던 생각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이곳 2층에 오르기 전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입구를 둘러보았었다. 그곳엔 무슨 용도인지 시멘트가 바닥에서 큰 바위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거푸집을 대서 형상을 만든 것도 아니었다. 울퉁불퉁한 그것을 보는데 색깔이나 모양이 하늘에서 떨어진 무슨 운석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삐끄덕거리는 계단을 올라, 삐쭉한 철근 사이로 발을 내밀어 2층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리는 순간,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생각이 찾아왔던 것이다. 하얗게 빻은 밀가루가 찬찬히 쌓인 곳, 곱고 고운 모래가 퇴적되어 쌓인 곳 같은 2층의 콘크리트 바닥에 발을 놓을 때, 혹 나는 지금 달 표면에라도 착륙한 것이 아닐까!


벌렁 드러누운 채 하늘의 등불이 지는 것도 보면서, 인간의 마을에서 전깃불이 켜지는 것도 보면서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터무니가 없어도 좋다. 하늘에 달이 뜨기 전까지 여기는 분명 나에겐 달의 표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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